[단독] 반기문·이해찬 뉴욕 회동 불발…5년 전 서운함 작용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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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이해찬 전 총리의 뉴욕 회동이 불발됐다. 반 총장과 이 전 총리 일행은 8일 낮 12시30분(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면담을 하기로 예정해 놓았으나 하루 전인 7일 이 전 총리 측이 이를 취소했다. ‘노무현재단’ 이사장인 이 전 총리는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재단 관계자 10여 명과 함께 미국 국무부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 중이다.

MB정부 때 봉하마을 찾은 반 총장
“참배 사실 비공개로 해달라” 요청
친노 “총장 만들어줬는데” 배신감

면담이 하루 전에 갑자기 취소된 데 대해 유엔 관계자는 “이 전 총리 측으로부터 면담을 하지 않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노무현재단 측은 언론에 배포한 자료에서 “이번 면담은 이 전 총리의 뉴욕 방문 소식을 듣고 유엔대표부가 제안해와 추진됐지만 일정이 공개되고, (반 총장 측에서) 면담을 언론에 공개하겠다는 입장을 알려와 비공개로 차 한잔 하기로 한 만남의 성격이 변화됐다”고 취소 이유를 밝혔다. 도종환 의원은 “면담에 기자를 배석시키고 브리핑까지 하겠다고 한다. 처음에 얘기했던 것과 다르게 얘기가 돼 못 만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번 회동이 취소된 데는 반 총장과 친노 인사들 간 뿌리 깊은 ‘갈등’도 작용해 반 총장이 퇴임 후 정치 행보를 할 경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5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11년 말. 노무현 정부 초반 청와대에서 일한 김희상 전 국방보좌관이 반 총장에게 e메일을 보냈다. “친노 인사들이 '노 대통령이 유엔 사무총장을 만들어줬는데 서거(2009년) 후 참배도 하지 않느냐'고 불편해한다. 이제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반 총장은 “이미 봉하에 가서 권양숙 여사를 예방했다”는 답변을 보냈다고 한다. 반 총장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12월 1일 봉하마을을 찾았다. 다만 “참배 사실을 비공개로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친노 인사들과 반 총장이 틀어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유인태 전 의원은 8일에도 “만약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반 총장이 참배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을지 의문”이라며 “당시 모두 다 ‘이 사람은 참 소심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친노 인사는 “반 총장이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불참한 건 물론이고 방한 중에도 봉하마을을 찾지 않았다”고 서운해했다.

이번에 미국을 방문하기 전 이 전 총리는 노무현재단에 전화해 “반 총장이 봉하를 참배한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재단 관계자가 전했다. 반 총장과 만나면 작심하고 당시 일을 따져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이 전 총리가 만남을 취소한 데 대해 친노 인사들은 “굳이 새누리당의 주자로 나서겠다는 반 총장의 행보에 자칫 들러리를 설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친노 핵심 인사는 “반 총장이 면담 사실을 오준 유엔 대사 등을 통해 의도적으로 유출시켰다”며 “이 전 총리를 활용해 몸값을 높이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친노 인사들이 이처럼 반 총장을 비판하는 배경에는 “우리가 유엔 사무총장을 만들어줬는데 배신당했다”는 정서가 작용하고 있다. 유인태 전 의원은 “노무현 정부는 당시 59세로 은퇴 수순을 밟던 반 총장을 청와대 외교보좌관으로 발탁해 외교부 장관에 이어 유엔 사무총장으로까지 만들었다”며 “대통령부터 국회의장, 총리까지 전 세계를 상대로 ‘올코트프레싱’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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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정대철 상임고문은 “나도 반 총장 부탁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유엔 사무총장을 하겠다’는 말을 전한 일이 있다”며 “새누리당으로 가더라도 최소한 양해는 구하는 게 맞다. 김종필 전 총리부터 찾을 게 아니라 자신을 도왔던 이 전 총리 등에게 전화라도 했어야 하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강태화·이지상 기자, 뉴욕=이상렬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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