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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렇더라|본사 금창태 편집국장대리 취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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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깝고도 멀었고 하나이면서 둘이었다.
편도2백20㎞. 서울에서 아침을 먹고 평양에서 점심을 들며 이 짧은 길을 다시 잇는데 12년이나 걸려야 했던 사실이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스스로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북한의 모습은 실향민들이 그리고있는 옛 고향과는 너무도 달랐다. 풍속과 인심, 사람들마저 딴 세상 사람처럼 바뀌어 가는 북녘땅-. 한핏줄을 되새기면서도 「분단40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의 3박4일을 정리해본다.
저만큼 산등성이에 고압전신주와 같은 철탑이 보인다. 꼭대기에 펄럭이는 북괴기. 8월26일 상오9시30분-.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자 펼쳐지는 풍경. 「40년의 세월」 에 가렸던 산하가 눈앞에 다가온다. 저기가 북한땅이다. 가벼운 흥분이 가슴에 물결친다.
사천강을 건너는가 했더니 퀀셋모양의 나지막한 단층목조건물이 오른쪽 차창을 스쳐갔다.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된「평화촌건물」이다. 앞벽에 그려진 푸른색 비둘기그림이 잿빛으로 퇴색해 있다.
시속80km. 버스는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좌우 2열횡대로 흩어져있는 아스팔트길을 달리며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저 돌들이 왜 저렇게 깔려있지요?』
『땅끄 (전차) 막기 위한 것 아니갔시요』
북측 안내원이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우거진 잡초, 아카시아나무, 바람에 파도를 일으키는 벼이삭들은 얼마전 설레는 가슴으로 지나온 우리쪽 비무장지대와 다를 것이 없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만세!』『3대혁명의 붉은 기치를 따라 힘차게 앞으로!』

<뱀막으려 횟가루칠>
흰바탕에 붉은 글씨로 휘갈겨 쓴 구호탑이 눈에 들어온다.
플라타너스, 그리고 이따금 버드나무로 이어지는 가로수 밑둥에 일정한 높이로 회칠을 해놓았다. 마치 흰양말을 신고 줄을 서 있는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야산기슭에 띄엄띄엄 들어선 기와집 벼락과 지붕의 용마루에도 모두 회칠을 해놓았다. 낯선 풍경이다.『횟가루 칠을 해놓으면 뱀이나 해충이 집에 접근을 아이하지요.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님이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교시를 내렸시요』안내원의 설명이다. 북쪽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어디를 가나, 어느쪽을 향하나 거기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이 입버릇처럼 있었다.
「김일성주석」을 빼고 북한의 현실을 말할 수 없다.
혁명박물관 앞뜰의 거대한 동상에서부터 살림집 안방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김일성의 존재는 북한의 전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물리적 공간만 그런것이 아니다. 사상·이념은 말할 것도 없고 남녀간의 애정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어느분야에 가나 「주석님의 현지교시」를 써붙인 액자를 볼 수 있었다. 의복·된장·간장·김치에 대하여 언급한 것도 있었다.
어느 휴양소에는 『코고는 사람과 코골지 않는 사람을 한방에 투숙시켜 잠을 설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교시까지 나붙어 있다.
갑자기 버스의 진동이 심해진다. 아스팔트 길이 손바닥만한 돌로 포장된 2차선도로로 접어 들었다.
오른폭 들판끝을 따라 흰바위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은 산등성이가 나타났다.

<개성인구 35만여명>
송악산. 어느새 개성이다. 흰웃도리에 멜빵이 달린 감색스커트를 입은 여학생 10여명이 두줄로 열을 서서 걸어간다. 우리들의 차량 행렬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가슴에 단 천연색의 김일성배지가 눈을 끈다. 북한사람들은 14세이상이면 모두가 김일성배지를 달고 있었다. 배지를 달지 않은 사람은 배꼽 빠진 사람처럼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4∼5층짜리 아파트가 보인다. 창가에는 집집마다 화분을 내놓았다. 아파트는 거의가 미색 페인트칠을 해놓았으나 지은지 오래된 듯 우중충한 모습들.
『시가지 중심부에 있는 아파트는 오래된 것들이지요. 82년이후부터 1번도로를 따라 10∼20층규모의 아파트 20동을 건설했디요. 현재는 부산동북쪽에 또 20층이상 고층아파트를 짓고있디요』1번도로는 판문점∼개성∼사리원∼평양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겸 군사도로 역할을 한다고 했다.
『개성도 인구가 35만명을 넘어요. 1954년 행정구역 개편때 황해도를 황해남도·북도로 분리하고 개성시를 직할시로 승격시켜 유서깊은 개성시를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 왔디요. 그래서 선죽교·남대문·성균관이 모두 잘 보존되고 있는 게지요』
안내원이 설명에 열을 올리는 사이 버스는 남대문을 오른쪽으로 끼고 비스듬히 돌아간다.
옛도읍 개성은 아직도 예스런 향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비록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건물들이 도심을 덮었지만 그 한가운데 남대문이 제모습을 지녔고, 선죽교는 변하지 않는 의기를 상징하듯 거기 그대로 있었다. 충신 정몽주의 선혈자국도 그대로 남아 충혼을 말해주고 있다고 했다. 남대문 돌축대에는 담쟁이 덩굴이 푸르고 종루위 쇠북도 덩그렇게 달린 것이 보였다. 무더위를 피해 나온듯 흰남방차림의 노인 4∼5명이 종루에 서서 우리들의 차량행렬을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대문앞 로터리에는 붉은 꽃으로 꾸며진 화단이 제법 정돈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송악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훤히 트인 커다란 공원이 보인다.
한가운데 거대한 김일성동상이 남쪽을 향해 서있다.
『저기가 바로 자남산이디요. 일제때 신궁자리로 해방후에는 한때 군사기지였디요』안내원의 설명은 계속된다.
『뎌기 선죽교와 옛 선죽 국민교 사이에 보이는 큰 건물이 자남여관이란 호텔이디요. 선죽교 옆 동부개울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옛날에 악명 높던 소년형무소 자리인데 지금은 그 자리에 유명한 개성방직공장이 들어섰디요. 지금도 방직공장 뒤쪽에 큰 벽이 길게 남아 형무소의 흔적을 찾아 볼수 있디요』

<평산∼평양간만전철>
상오10시5분. 차량행렬은 개성에 멈췄다. 개성역 맞은편 우중충한 4층아파트에서 아낙네들이 머리를 내밀고 손을 흔든다.
역전광장에는 붉은 글씨로 『위대한 김일성수령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라고 쓰인 네온사인 구호탑이 우뚝 치솟아 있다. 광장 왼쪽에는 「역전려관」이란 간판이, 오른쪽에는 「역전종합편의」라고 쓴 네온사인이 보인다. 「종합편의」란 시계·TV·구두등 생활용구를 수리하는 「수리센터」.
역사 정면벽에는 모택동복 차림의 김일성 상반신 천연색 초상화가 걸려 있다. 북행길은 여기서부터 열차편으로 바뀐다. 그 옛날 서울∼개성∼평양을 거쳐 신의주, 만주까지 연결되던 경의선. 여문성∼평산간만은 전화가 안돼있습니다. 평산까지는 디젤기관차로 달리고 평산∼평양은 전철로 바꾸어 달리디요』안내원의 설명.

<사리원엔 운하시설>
한적대표단이 플랫 폼으로 들어서자 회색정장상의에 검은색스커트를 입은 여자안내원이 차렷자세로 거수경례를 한다. 검은구두를 신고 허리에는 널따란 가죽띠를 둘렀다. 철도국배지를 단 검은모자를 쓰고 칼러에는 군인계급장 비슷한 표지를 달았다. 복장이나 몸짓이 영락없는 여군같다. 교통 위원회 산하 철도국 안내원이라 했다. 침대차 13량이 연결된 전용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마다 오른쪽으로 복도가 나있고 왼쪽으로 9개의 특실이 설치된 열차였다. 내부는 2층으로 나누어져 위쪽은 침대 2개, 아래폭은 의자와 탁자가 놓여있다. 방1칸마다 대표 2명과 안내원 2명 모두 4명이 탔다.
안내원들은 우리를 창문쪽으로 앉도록 배려했다. 탁자에는 용성맥주 2병, 레먼사이다 2병,배단물, 배맑은즙, 캔으로 된 닦은 낙화생 (껍질벗긴 땅콩) 1통, 가공명태포 4개, 사과3개, 「홍초」려과(필터) 담배1갑, 유리재떨이 1개, 그리고 나이프·포크·플래스틱컵 등이 준비돼 있었다. 왕골로 짠 슬리퍼도 2켤레가 놓여 있었다.
북한측이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해 처음으로 만든 침대차로 우리 일행이 첫 손님이라고 했다. 상오10시15분. 열차가 출발했다. 안내원들은 음료수와 맥주를 권하며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듯 했다. 맥주잔이 몇차례 오가자 분위기는 금방 부드러워져 농담을 주고 받을 만큼 쉽게 어울렸다.
『북한에서는 며느리가 시아버지보고도 「시아버지동무」라고 합니까.』
『옛끼 여보, 그러다간 당장 쫓겨나오』
웃음이 터졌다.
『북한에서도 코피를 마시나요』『우리공산주의자는 코피도 마시면 안됩네까?』
가슴 죄며 판문점을 넘은지 한시간 남짓. 내가 지금 이들과 맥주를 함께 마시며 농담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용성맥주는 맛이 우리나라의 OB와 크라운 중간쯤될까, 다소 탁한 느낌이 들고 빛깔이 짙었다.
분홍색원피스 차림의 여자 접대원이 연방 드나들며 재떨이를 갈아주고 빈맥주병을 내간다. 이른바 「서비스」란 개념이 북한사회에도 자리잡기 시작한 모양이다.
차창밖으로는 삼포가 스쳐가고 스프링클러가 물을 뿜는 채소밭에서 비닐우의를 입고 일을 하고 있는 농부의 모습도 지나간다.
사과밭이 산중턱에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내원은 봉산이 얼마 안 남았다』고 일러준다.
『온사회를 주체사상화 하자』 『위대한 주체농법만세』라고 쓴 붉은색 플래카드가 산기슭에 꽂혀있다.
푸른색 뜨락또르(트랙터)가 가마니를 싣고 털털거리며 지나간다. 평양에서 30㎞ 떨어진 대안시에 자리잡고 있는 「금성 뜨락또르공장」에서 58년 「천리마」호 뜨락또르 제l호를 생산했단다. 그후 「풍년」「주체」등 몇가지가 나왔다고 한다.
산기슭에 흰색의 건물이 나타난다.
『닭공장입니다. 우리는 닭을 치는 것도 공업화 했디요』규모가 큰 양계장이란 뜻이다. 『농촌 곳곳에 돼지공장·오리공장도 있다』고 자랑삼아 얘기했다. 『생산량은 얼마나 되오』『몰라요. 농촌에 있는 것까지 어떻게 알갔소』
사리원에 들어섰다. 전에는 황해도 봉산군 봉산면 이었는데 54년에 황해북도가 되면서 사리원시로 승격, 도청소재지가 됐다. 『수도평양의 관문이디요. 수령님께서 남조선통일대표 오게되면 여기는 꼭 고쳐야 한다고 교시하셨디요. 그동안 50차례나 왕래하시며 현지 교시하셨디요』 사리원발전계획에 따라 사리원방직공장도 건설했다 한다.
여기도 전혀 옛모습은 찾을수 없게 됐다는 것.
거리한가운데 운하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른다.
『이북에선 물은 흔하게 써요. 그전엔 고생했디요. 경사가 심한데는 수문을 만들어 물을 모았다가 퍼 올리지요』
사과밭으로 이름난 황주를 지나면 긴 등벌 (등성이가 길어서 붙인 이름) 이 펼쳐진다. 긴등벌은 원래 물이 귀해 황무지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옛날 나그네가 지나가다 「물 한모금 얻어 먹읍시다」하면 「물은 못주어도 밥은 드리디요」라고 했던 곳』이라 했다. 그러나 그동안 30여개의 수로를 만들어 긴 등벌의 농업용수를 해결해 나간다고 말했다.
사과밭·포도밭이 계속되는가 했더니 잡초처럼 무성한 풀밭이 나타난다.

<유채식물개량 자랑>
「기름골」이란 유채식물이라 했다. 황해남도 안악군 출신인 식물학자 백성희(여)가 14년간 연구끝에 콩알만하던 뿌리를 엄지손가락 만한 것으로 품질을 개량, 식용유를 짜낸다고 했다. 맛은 콩기름 비슷하고 기름을 짜낸 찌꺼기로는 과자도 만들고 두부도 만들어 버릴것이 없다고 했다. 토질이 나쁜데서도 잘 자라 전국 어디서나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
『백성희는 기름골 개량을 찌마(테마)로 김일성 종합대학 식물학부 식물과학연구소에서 시집도 안가고 연구끝에 성공했디요. 그 공로로 수령님께서 손수 영웅메달을 달아주시고 품에 껴안고 손목시계까지 채워 주셨디요. 수령님께서 그때만큼 기뻐하신 적도 없었을께요』
백성희의 사례는 지금도 학습자료가 되고있으나 그가 개발한 기름골의 씨앗은 비밀에 부쳐져있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영양단지라는 옥수수 조기 재배 묘판을 개발, 옥수수 수확도 종전보다 한달가량 앞당기고 있다고 자랑했다.
남의 기자에게 북의 안내원이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 사이 열차는 종착역을 눈앞에 두고 막바지 달음질을 쳤다. 하오 l시20분. 멀리 평양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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