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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무덤까지 이어지는 욕망, 그 허망한 함정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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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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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문단의 원로 시인께서 사석에서 하신 말씀을 전해 들었다. “내가 죽은 후 무덤을 열면 시(詩)가 수북이 쌓여 있을 것이다.” 원로 소설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듣기도 했다. “나는 죽어서 누워 있다가도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무덤을 열고 나올 거야.” 두 손을 양쪽으로 벌려 문 여는 시늉까지 하며 간곡한 표정을 지으셨다. 욕망의 생생함, 그 질긴 생명력에 대한 고백으로 들렸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욕망을 본질적으로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생존을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유아기에 필요로 하는 것과 충족된 것 사이에 결여된 것이 남는데, 그 결여가 무의식에 쌓여 욕망이 된다고 정의한다. 많은 이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랑, 명예, 지식, 물질 등 저마다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추구하지만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순간 마음속 구멍이 더 커지는 증상을 경험한다.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다는 점과 승화적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그 위력이 줄지 않는다는 데 욕망의 함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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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또 다른 원로 선생님은 나이 차이 많은 젊은 연인과 갈등이 생겼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가 내 인생의 마지막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 문장은 후배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진다. 또 다른 원로 예술가는 젊은 여성과 서너 차례 새 출발을 반복한 후 이런 말씀을 남겼다. “나와 가장 마지막에 살아주는 여자에게 유산을 모두 넘길 계획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실체를 간파한 이들의 언어로 들린다.

“욕망은 주체로부터 독립돼 있으며, 현실의 대상이 아니라 환상과 관계한다. 또한 그것은 현실적 욕구로 환원될 수 없다.” 역시 라캉의 정의다. 현실적 만족을 모르는 욕망은 환상을 향해 저 혼자 내달린다. 이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납득할 수 없는 행위를 이어가는 이들의 배면에서 작용하는 힘이 욕망이다. 욕망은 욕동을 결정짓는 힘이 되고, 욕동이 추체를 추동하여 내달리게 할 때는 자아의 판단력이나 초자아의 도덕성이 약화된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욕망을 표나게 과장해서 드러내기를 즐긴다. 욕망의 존재 여부를 생물학적 생명력이나 사회적 권력과 등가로 여기는 착오적 인식 때문에 기회 있을 때마다 ‘살아 있음’을 강조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직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노력하는 마음 뒷면에조차 주체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을 테지만.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