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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디테일의 재발견] 베일 벗은 ‘아가씨’ 두 개의 시선으로 탐미하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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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신작 깊이 읽기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6월 1일 개봉)가 베일을 벗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순진한 귀족 아가씨와 그의 재산을 노리는 사기꾼과 하녀, 추악한 비밀을 감춘 아가씨의 후견인 등 네 남녀의 욕망이 아가씨가 사는 저택에서 충돌한다. 수위 높은 정사 장면과 탐미적인 비주얼 등 박 감독의 전작들에서 익숙하게 보아 온 기호로 빼곡하다. 김형석·김현민 영화저널리스트가 각각 형식과 주제 면에서 ‘아가씨’를 파헤쳐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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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가씨` 스틸컷]

원작보다 매혹적인 '점입가경' 스토리텔링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 중 가장 아름답다. 특히 구조적으로 아름답다. 단지 비주얼이나 미장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에서 스토리텔링의 미묘하고 섬세한 쾌감을 선사한다. 원작인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열린책들)가 지닌 흥미로운 구조가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박쥐’(2009)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문학동네)을 각색했다고는 하지만, 그 틀을 가져왔을 뿐 뱀파이어 장르와의 결합으로 원작의 영향력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반면 ‘아가씨’는 원작이 지닌 반복과 변주의 이야기 구조와 인물 관계를 상당 부분 가져온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담아내지 못한 감각적인 재미까지 담는다.

‘아가씨’는 3부로 나뉜다. 챕터마다 음모의 주체가 다르다. 1부에선 후지와라 백작(하정우)과 숙희(김태리)가 계략을 꾸민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숙희다. 2부에선 후지와라와 히데코(김민희)의 음모가 드러난다. 숙희는 희생양이었고, 히데코 대신 병원에 들어가 죽을 운명이었다. 3부에선 숙희와 히데코의 연대가 드러난다. 후지와라가 계략을 위해 각각 포섭한 두 여인은 의기투합했고, 결국 그를 몰락시킨다.

한마디로 ‘점입가경’ 스타일의 이야기다. 1부에서 제시된 사건은 2부에서 다르게 반복되는데, 사실 이 구조는 위험하다. 클라이맥스가 아닌 영화 중반에 이미 중요한 반전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이런 상태에서 극적 긴장감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박찬욱 감독은 섬세하게 이야기를 조율한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몇몇 장치를 통해 이야기에 탄력을 더한다. 먼저 2부는 1부를 통해 추측할 뿐이었던 사건의 실체를 드러낸다.

더욱 흥미로운 건, 이 영화의 장면은 반복을 통해 비로소 그 완전한 모습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1부에서 후지와라와 숙희가 말다툼하는 신이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2부에 와서 그 광경을 히데코가 엿보는 장면이 결합되어야 그 신의 의미는 완전해진다. 숙희가 히데코가 사는 코우즈키(조진웅)의 집에 온 첫날 밤, 1부에선 숙희가 히데코의 방을 바라보지만 2부에선 히데코가 숙희의 방을 바라본다. 이 장면 역시 2부에서 시선의 역전이 이뤄지며 완성된다. ‘아가씨’는 ‘시점의 게임’이라 할 수 있는데,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추가되거나 포지션이 바뀐 시점 숏들은 관객에게 익숙했던 이야기를 새롭게 전달한다. 똑같은 대사는 1부와 2부에서 그 화자를 달리하며 반복되고, 그런 맥락의 변화를 통해 대사의 뉘앙스는 풍부해진다.

또한 1부에서 중단되어 유예됐던 장면은 2부에서 본격적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숙희와 히데코의 섹스신이 대표적이다. 1부에서 숙희는 ‘숙맥’이라 여기는 히데코에게 키스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하지만 관객은 1부에서 이 장면을 끝까지 보지 못한다. 아니, 이때 끝났다고 생각했던 신은 2부에서 이어지며 비로소 격렬한 베드신으로 완성된다. 이는 하나의 신을 나눠서 보여 준 것인데, 1부에서 키스신 정도였다면 2부에선 섹스신으로 나아간다. 이런 스토리텔링 방식은 관객의 기대감과 끊임없이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아가씨’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중요한 테크닉이다.

1부의 이야기를 반복한 2부가 끝나면,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3부가 기다린다. 두 여인은 연인이 되어 중국 상하이로 갔다. 후지와라와 코우즈키, (일본인을 가장하는 조선인) 두 남자는 저택의 지하실에서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2부에서 미처 반복되지 못했던 이야기가 등장한다. 후지와라와 히데코의 초야에 대한 진실이다. 이처럼 ‘아가씨’의 이야기는 각 장면들이 이어져 기승전결을 이루며 직선적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간격을 두고 여러 겹을 이루며 전개된다. 그런데 이 복잡한 구조가 정작 영화를 볼 땐 감춰져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여러 장치 때문이며, 캐릭터 감정과 잘 결합하는 편집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각 신이 만들어지고, 그 신들이 모여 조금 더 큰 단위인 시퀀스를 이루며, 시퀀스들이 모여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이룬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전작인 ‘스토커’(2013)에서 다양한 이미지와 시간대가 교차 편집되어 만들어진 덩어리(시퀀스)가 마치 심포니의 각 악장처럼 이어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반면 ‘아가씨’는 영화가 모두 끝난 후에야 각 장면의 의미가 결정되고 완성되는,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 같은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많은 요소들이 흥미롭지만, 그 이야기가 퍼즐처럼 맞춰지며 전체를 이뤄 가는 흐름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과정일 것이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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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가씨` 스틸컷]

복수 아닌 자유를 논하는 박찬욱의 반전 무비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에 비하면 완전히 힘을 뺀 영화다. 플롯의 구조는 복잡하지만 이야기는 단순하고, 잔혹함은 애교 수준이며, 무엇보다 인물의 ‘복수’가 아닌 ‘자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박찬욱 감독이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조선, 특히 막대한 부를 가진 인물을 그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스토커’(2013)의 탐미적인 시선이 쉽게 연상됐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동서양의 건축 양식을 이질적으로 결합한, 볼거리로 가득한 주 무대가 등장하지만 그 자체를 향한 관음의 시선은 거뒀다. ‘아가씨’는 어디까지나 인물과 이야기에 집중한다.

총 3부로 나뉜 이 영화에서 1부는 작당 모의하는 사기꾼들의 케이퍼무비, 2부는 인물들의 감춰진 감정이 드러나고 꽃피우는 로맨스, 3부는 페미니즘 로드무비의 태도를 취한다. 서사의 결말은 판타지에 가까울 정도로 위기감 없이 선명하다. 그러니까 영화는 냉엄한 현실과의 간극 따위엔 의도적으로 관심이 없다. 인물의 감정 또한 내밀한 화법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관객이 알아차리기 쉬운 에피소드를 아주 경제적으로 배치한다. 대신 구조를 통해 감정의 그물망을 짠다. 우리는 1부를 거치고 2부가 되어야 비로소 ‘진짜 아가씨’를 본다. 1부의 아가씨 히데코는 가짜다. 1부를 볼 때는 왜 김민희가 이렇게 파리하고 퇴행적이기까지 한 역할을 맡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2부가 열리면 김민희가 이것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영화를 두 번 보고 싶게 만드는 강력한 장치이기도 하다. 진실을 알게 되면 가짜 행세를 구경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아가씨’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사기꾼이다. 신분을 감추고 히데코를 속이려는 백작과 숙희, 다시 숙희를 속이기 위해 손을 잡는 백작과 히데코, 한국인이지만 일본인 귀족인 척 살아가는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까지. 서로를 속고 속이며 작동하는 이 세계의 무기는 언어이며, ‘아가씨’는 곧 말의 향연이다. 히데코에게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백작의 과장된 톤, 히데코가 은밀하게 낭독하는 쾌락의 언어, 미묘한 떨림까지 연기해 내는 코우즈키의 고급 일본어, 문맹인 숙희가 거침없이 내뱉는 저속한 욕설들···. 극의 강력한 갈등 주체인 코우즈키는 ‘서재’라는 언어의 세계를 통제·지배하고 있다. 코우즈키가 존재하는 한 숙희는 이곳에 발조차 들일 수 없다. 글을 깨우치지 못한 숙희는 ‘무지의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꾼에게도 약점은 있는 법이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히데코도, 숙희도, 백작도. 각자의 언어로 사람을 교란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감정까지 속일 수는 없다. 이 장면을 위해 ‘아가씨’를 찍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농밀한 공기를 응축해 낸 욕조 장면을 떠올려 보라. 서로를 탐색하고 욕망하기 시작하는 두 여자가 느끼는 혼돈.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한 호기심 어리고 저돌적인 김태리의 까만 눈은 이 신의 지배적 이미지다. 히데코와 하녀의 정사신은 관능이 넘친다. 남자들의 눈에 히데코는 욕망이 없고 그와 몸을 섞는다면 “시체와 교접”하게 되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양 여기지만, 숙희의 입김이 닿은 히데코의 몸은 아기처럼 보드랍고 따뜻하다. 영화 속 남자들은 여자들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나쁜 피’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만, 어머니의 부재라는 공통점을 가진 여자들은 그 빈자리를 서로의 존재로 채운다. 두 여자가 거울 앞에서 ‘아가씨 놀이’를 하며 겹쳐 선 뒷모습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 장면에서 그들은 하나다.

이 영화에서 남자를 처단하는 것은 남자의 몫이다. 여자는 자신의 손에 남의 피는 한 방울도 묻히지 않는다. 히데코는 집에서 도망치기 직전에 숙희를 코우즈키의 변태적 성역인 서재로 데려가고, 음란한 책을 보고 분노한 숙희는 책을 물에 빠뜨려 훼손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정서적 클라이맥스로, 이때 히데코의 독백은 의미심장하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박찬욱 감독이 ‘복수 3부작’에서조차 부정했던 구원의 가능성을 여자들의 사랑을 통해 버젓이 이야기한다.

‘델마와 루이스’(1991, 리들리 스콧 감독) 같은 그들이 무사히 중국 상하이로 떠날 때의 배경 사운드는 코우즈키에게 끌려가 가학적인 고문을 당하는 백작의 신음이다. 배에 오른 히데코는 코우즈키가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할 때 쓰던 구슬을 숙희와의 성적 놀이 도구로 삼는다. 백작의 회상에 등장하는 히데코와 숙희의 얼굴은 선명하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백작의 얼굴은 흐릿하다.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는 뜻이다. 달이 차오른다. 압도적인 여성들의 승리. 이것은 박찬욱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낭만적인 결론이다. 한국 대중영화 신에서 페미니즘을 이토록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있었던가. 그것도 장르적 카타르시스가 유연하게 뒤섞인 아름답고 유쾌한 방식으로.

김현민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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