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중고서점 습격사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기사 이미지

박정호
논설위원

잠시 눈을 의심했다. 아니, 이런 새 책도 있다니….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알라딘 중고서점 잠실롯데월드타워점을 지난 주말 찾았다. 고(故) 신영복 교수의 『처음처럼』 신판이 서가에 꽂혀 있었다. ‘2016년 3월 25일 개정 신판 3쇄 발행’ 서지 사항을 확인했다. 낙서 하나 없이 깨끗했다. 신 교수가 지난해 말 병상에서 보완한 원고를 새롭게 엮은 책이다. 중고매장이라 값은 쌌다. 9800원. 인근 교보문고 잠실점에서 사려면 1만4000원을 줘야 한다. 온라인 주문하면 10% 할인해 1만2600원이다. 누군가 구입 직후 되팔았는지 모른다. 알라딘 본사 측은 “출간 6개월 이하 책은 매입은 해도 판매는 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착오가 있었다는 건가.

요즘 대형 중고서점이 인기다. 알라딘·예스24 등 온라인 서점이 적극적이다. 알라딘은 현재 전국에 중고매장 24곳을 꾸려가고 있다. 지난해 전체 매출 2400억원 가운데 중고서적 매출이 1000억원에 이른다는 추계도 최근 나왔다. 국내 최대 온라인 서점 예스24도 지난 4월 서울 강남역 근처에 번듯한 중고매장을 열었다. 회원들이 구입한 책을 오프라인 영풍문고 매장에서 사주는 제도도 도입했다. 새로 들어선 중고매장은 책 읽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고 커피도 파는 등 서비스 개선에도 열심이다. 동네서점은 명함을 내밀 수 없을 정도다.

출판계에선 찬반이 일고 있다. “책을 싸게 산다”는 긍정과 “출판시장 교란”이란 부정이 엇갈린다. 소비자 입장에선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읽고 난 책을 팔아 적게나마 돈을 만지고, 또 저렴한 값에 원하는 책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정이 있다. 온라인 서점들은 ‘바이 백(buy back)’이란 이름으로 고객에게 판 책을 정가의 50% 이하에 되사 중고매장에 내놓고 있다. 이 정도면 정체가 헷갈린다. 서점인가, 도서대여점인가. 구간(舊刊)도 최대 10%까지 할인할 수 있다는 도서정가제의 빈틈을 파고들고 있다.

현재 대형 중고서점은 고물상으로 등록돼 있다. 서점은 중기적합업종으로 지정됐기에 규모가 큰 온라인 서점은 오프라인 서점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3년 후 규제가 풀릴 것을 예상한 ‘우회상장’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사실 중고서점은 일반 서점의 보완재다. 절판이 되거나 구하기 힘든 희귀본을 만나는 문화의 실핏줄 같다. 그런데도 ‘위장된 신간’이 버젓이 팔리는 현실, 그 비중이 작더라도 뒷맛이 씁쓸하다. 스테디셀러가 큰 타격을 입을 게 분명하다. 문화계에 드리운 불황의 그림자가 불길하기만 하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