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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알베르토의 문화탐구생활] 그들은 왜 밀라노와 피렌체에서 재회했을까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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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연히 본 영화 가운데 신기하게도 이탈리아가 배경으로 나오는 경우들이 많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조스 웨던 감독)처럼 한국에서 촬영한 영화를 볼 때면, 여러분도 해외 관객에게 한국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 주고 싶어지지 않나. 나 역시 여러 영화에서 그린 이탈리아를 보며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에 대해 소개하고 싶어졌다.

‘냉정과 열정 사이’

특히 지난 4월 재개봉한 ‘냉정과 열정 사이’(2001, 나카에 이사무 감독)는 예전에 한글로 번역된 원작 소설을 읽은 터라 반가웠다. 아내가 “이탈리아가 배경인 이야기”라 말하기에 가볍게 읽었는데, 이번에 영화로 보며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극 중에서 준세이(타케노우치 유타카)는 피렌체의 작은 다락방에 사는 예술품복원가다. 아오이(진혜림)는 밀라노의 보석 매장에서 일하며 남자친구와 함께 고급 빌라에 산다. 오래전 연인 사이였던 두 사람은 밀라노에서 재회하지만, 이미 새로운 사람이 생긴 아오이는 준세이를 차갑게 대한다.

냉정과 열정은 연애할 때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다. 냉정은 주로 사랑에 대한 두려움과 연결된다. 상대에게 마음을 열어야 하는데 두렵고 용기가 없으니 더욱 냉정해지는 것이다. 반면 사랑에는 열정도 필요하다. 용기 내어 사랑을 고백하고 상대를 위해 주저 없이 희생하기도 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이러한 감정들을 남녀 주인공에게 각각 반영한다. 영화에서 눈여겨볼 것은 러브 스토리가 펼쳐지는 이탈리아의 두 도시다. 왜 하필 밀라노와 피렌체여야 했을까. 그 이유를 알고 나면 매 장면을 예사롭게 넘길 수 없다.

이탈리아는 통일을 이룬 지 불과 155년쯤된 나라다. 원래 사르데냐·베네치아·시칠리아·교황령 등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다가, 1861년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합됐다. 지역별 문화·언어·역사·전통·관습·음식 그리고 사람들의 개성은 지금도 저마다 다르다. 가끔 어떤 지역에 가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밀라노와 피렌체도 그런 도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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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열정과 냉정사이의 한 장면 [중앙포토]

아오이가 사는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1인당 GDP(G-ross Domestic Product·국내 총생산)가 가장 높은 대도시다. 정치적 영향력은 수도 로마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상업·공업·금융 분야에서는 단연 1위라 콧대도 높다. 밀라노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처럼 바삐 살아간다. 어디에 가든 사람들로 북적이고 날마다 교통 체증과 싸우다 보니 성격도 느긋할 리 없다. 어쩌면 그것이 ‘밀라노 사람은 까칠하고 냉정하다’ 말하는 이유다.

한편 이곳은 패션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비롯한 럭셔리 산업에서 언제나 유행을 선도하는 ‘명품 1번지’다. 그만큼 소비주의 성향도 높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아오이가 계산적이고 합리적이며 경제적 안정을 위해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사귀는 건, 이러한 속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공허함에 시달리는 아오이처럼 말이다.

반면 준세이가 있는 피렌체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도시다. 밀라노에서 열차를 타면 고작 두 시간밖에 안 걸리지만 말이다. 도시 전체가 열린 박물관 같달까. 근대 유럽 문화가 태동한 르네상스의 근거지답게 여전히 곳곳에 당시 숨결이 깃들어 있다. 피렌체의 전성기가 시작된 건, 로렌초 데 메디치(1449~92)의 통치 아래 밀라노 공국의 침략을 막은 1469년부터다. 메디치 가문은 각 분야 최고 아티스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었으며, 예술은 도시를 부흥시켰다.

지금까지도 피렌체 경제는 예술가의 장인 정신과 함께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은 개발보다 옛 모습을 보존하려는 성향이 강해서, 건축물 대다수가 지은 지 500년이 족히 넘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좁은 골목에서 자전거를 타며 이웃과 인사 나누는 여유로운 삶. 대도시의 바쁜 일상 대신 따뜻하고 예술적인 분위기에 어우러져 사는 이들이 바로 피렌체 사람들인 것이다. 가난하고 힘들더라도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준세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피렌체는 과거의 영광 속에 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밀라노 같은 다른 산업 도시들과 비교하면 발전이 더딘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준세이 역시 예술을 사랑해 머나먼 이탈리아로 건너왔을 만큼 열정적이지만, 부유한 기업가인 아오이의 새 남자친구와는 조건도 배경도 많이 다르다.

지난날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은 예전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 준세이와 아오이 그리고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의 간극이나 모순처럼, 지금 이탈리아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세계 경제 대국 중 하나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 흐름에 따라 빠르게 발전하고 싶은 욕망, 예술과 전통문화를 보존하며 조금 더 느긋한 길로 가려는 마음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두 도시를 오가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러브 스토리가 내게는 단지 달콤한 연애담 이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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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알베르토 몬디. 맥주와 자동차에 이어 이제는 이탈리아 문화까지 영업하는
JTBC ‘비정상회담’ 마성의 알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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