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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인사이드] 직장 동료들 모함으로 스트레스 장애…법원 "산재 인정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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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동료로부터 모함을 받아 스트레스 장애를 얻었다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A씨는 2002년부터 서울 강동구 소재 지적장애인 시설에서 교사로 근무해왔습니다. 2013년 11월 동료교사 B씨로부터 큰 오해를 사면서 A씨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B씨는 자신이 작업하던 관찰일지가 컴퓨터에서 삭제된 것이 A씨 소행이라며 다그쳤습니다. A씨는 “내가 한 것이 아니다”고 강변했지만 주변동료들의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알고보니 4~5년 전부터 동료들 사이에서 ‘A씨가 교사들 물건을 가져가거나 컴퓨터 파일을 삭제한다’ ‘A씨가 장애인을 시켜 동료교사의 물건을 훼손시켰다’ 등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A씨는 “근거 없는 허위 소문을 내고 다닌다”며 B씨 등에 대해 재단에 징계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재단 측은 이 일을 A씨의 과민반응 탓으로 돌렸습니다. A씨는 정신적 충격으로 그해 말 병원에서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를 근거로 산재를 인정해달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공단은 "통상 직장에서 있을 수 있는 갈등”이라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A씨는 공단을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산재요양 불승인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단독 이규훈 판사의 판단은 “A씨가 겪은 스트레스 장애는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달 22일 A씨 승소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B씨와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A씨가 원만하게 직장 생활을 해온 점에 주목했습니다. 재판부는 “애초 발단이 된 사건이 A씨 소행이라고 볼 객관적인 근거가 없고 오히려 B씨의 진술 내용이 작위적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물품 도난과 같은 사건들은 직장 생활을 하며 통상적으로 겪는 갈등을 넘어선다”고도 했습니다.

재판부는 특히 업무상 재해를 판단할 때 개인의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의 유무는 보통 평균인이 아니라 해당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 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A씨의 성격 등 개인적인 성향이 영향을 미쳤더라도 업무상 스트레스가 겹쳐서 질병을 악화시켰다면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대법원이 스트레스 등 정신ㆍ정서적 장애를 업무상 재해로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와 일맥상통합니다. 대법원은 올해 2월 갑작스러운 인사이동과 직급 강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살한 C씨 사건에서도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습니다.

지방의 리조트에서 총무과장으로 근무하던 C씨는 인사 이동으로 책상도 없이 객실의 잡무를 담당하고,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대리에게 지시를 받으며 갈등을 겪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C씨가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에서 업무 마찰과 갈등으로 심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을 받다가 자살한 것인만큼 업무상 재해가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대법원은 2008년까지만 해도 “사회 평균인 입장에서 극복할 수 없는 정도의 스트레스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개인적 특성을 고려한 판결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인사혁신처 역시 이런 추세를 반영해 ‘공무상 재해’에 정신질환과 우울증, 불안장애,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포함시키는 공무원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지난 4월 입법 예고한 상태입니다. 지금까지 정신질환은 ‘산업재해’에는 포함됐지만 공무상 재해에는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이유정 기자 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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