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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시각각

"스타트업 투자? 검찰 눈치가 보여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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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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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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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금 지원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에인절투자자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며칠 전 서울 역삼동 팁스타운을 찾았을 때 마침 정부 관계자들이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기획재정부와 중소기업청 관계자들이 ‘현장’을 찾아와 회의를 한 것이다. “호창성 더 벤처스 대표가 5곳의 스타트업 업체에 투자해 주는 대가로 29억원 상당의 지분을 챙긴 혐의가 있어 구속기소했다”는 검찰 발표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호 대표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비키’라는 회사를 만들어 2000억원대의 대박을 냈던 장본인이다. <본지 4월 9일자 ‘2000억대 성공신화의 추락’ 참조>

이날 회의 참석 대상인 고영하 사단법인 한국엔젤투자협회장의 첫 표정은 다소 심드렁하게 느껴졌다. 그를 만난 건 스타트업 창업지원 프로그램인 ‘팁스’를 도입했던 한정화(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전 중소기업청장의 소개에 따른 것이었다. 벤처기업 전문가인 한 전 청장은 최장수 중기청장으로, 호 대표를 위해 장문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업계 분위기는 어떤가요.

“ 스타트업 투자가 다시 침체되고 있습니다.”

호 대표가 구속기소된 지 4주가량이 지났지만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는 듯했다. “성공한 창업가를 구속하면 성공한 검사가 됩니까?” 발언 수위가 처음부터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 막 싹을 키우려는 벤처업계에 검찰이 훼방을 놓은 겁니다. 이렇게 찬물을 끼얹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창조경제니, 청년창업이니 하는 것은 말뿐이라고 했다. “국가 시스템이 이렇게 허술한데 어떻게 좋은 인력이 좋은 기업을 창업하고, 좋은 나라가 되겠습니까.” 지난해 말부터 검찰 수사가 이뤄지면서 에인절투자업계와 스타트업 업계가 바짝 얼어붙었다고 했다. 창업자금을 지원받기 위한 사업심사 요청은 계속되고 있지만 자금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13년 제도 시행 이후 500억원가량의 팁스 자금을 160개 스타트업에 지원해 1600억원의 외자를 유치하며 정상 궤도에 접어들려다 주춤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벤처업계 등에선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의 적정한 분배를 요구하고 있다. 국내총생산 규모에 비교했을 땐 세계 1위며, 액수 면에서도 세계 6위인 18조원의 예산 중 일부를 청년창업을 위해 사용해 달라는 것이다.

현장에 있던 한 스타트업 업체 관계자의 주장. “정부 주도로 연구개발 예산이 여기저기 들어가고 있지만 성과는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세금이 줄줄 새고 있는 것이다. 정부 돈만 축내는 좀비 기업들이 수두룩한데 엉뚱한 곳만 혼내고 있다.”

다시 고 회장의 얘기를 들어 보자. “우리나라 경제는 앞으로 3~5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다. 철강,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반도체산업의 고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1만 개 이상의 스타트업 업체를 미리 키워야 한다. 500억원에 불과한 팁스 자금을 1조원으로 늘리면 매년 2000개가량의 스타트업을 만들수 있다.” 검찰이 정작 수사해야 할 곳은 정부의 R&D 예산 사용처라는 것이다.

이번 논란을 촉발시켰던 호 대표에 대한 재판이 20일부터 시작됐다. 검찰은 “자신의 지분 확보를 위해 국가 예산을 이용하는 것은 범죄”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검찰 주장처럼 호 대표 측이 국가 예산을 타기 위해 사업계획서를 허위로 작성했는지 여부는 재판에서 가려질 것이다. 검찰의 법논리에 대한 에인절투자자들의 반박 논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도 주목된다. 하지만 법원 재판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투자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다.

“투자요? 내가 왜요? 검찰 눈치가 보여서 투자하겠어요? 참,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젊은이들에겐 창업하지 말고 법조인 되라고 말하겠습니다.” 한 에인절투자자의 말이다.

55만 명의 대학 졸업자 중 30만 명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혁신과 창조’는 위험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