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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분단비극의 극한점/이만열<숙명여대교수·한국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다시 잊을수 없는 동족상잔의 6·25를 맞는다 .사상자 2백10여만명에, 제1차세계대전의 전비에 해당되는 1백50억달러 규모를 소모하였고 전쟁미망인 20만명에 전쟁고아 10여만명, 가옥파괴 60만채에 당시 공업시설의 45%가 파괴 혹은 가동불능의 상태로 몰아간것이 그 비극적 전쟁의 결과였다.
그러나 정작 그 비극의 생생한 체험은 숫자놀음을 좋아하는 통계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통계를 뛰어넘는 주관적 생활실체 속에 내재해 있다. 1천만 이산가족 한사람 한사람에게 맺혀져 있는 한은 앞서의 객관적 통계보다는 훨씬 진하게 응어리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단면을 이산가족찾기운동과정과 「만남의 광장」에 나타난 한맺힌 절규에서, 머리로 써가 아니라 가슴으로써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필자에게만 해도 6·25로 고향집이 잿더미가 되었고 그와중에 아버님을 여의었으며 홀로된 친누님이 있고 바느질로 자녀양육과 생계를 이어오신 종수씨가 계신다. 그들을 주변에서 대하는 한 6·25는 지나간 1회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연속적인 비극임에 틀림없다. 한맺힌 응어리를 새기면서 저주스러운 생을 보내야하는 우리네 이웃들의 생생한 체험들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6·25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민족분열과 냉전체제에서 연유된 국토분단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분출된 산물이었다. 이데올로기에의한 민족분열은 그 조짐이 일제하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미 표출되었던 것으로 2차대전 후 미소의 냉전양극체제가 조성한 국토분단에의해 고정화되었다.
이러한 민족분열의 내재적요인에다 냉전체제 당사자가 추구하고 있던 무력대결의 시험장으로서의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남조선해방」이라는 허울밑에 6·25를 일으켰던 것이다.
따라서 시각에 따라서는 6·25는 냉전체제의 모순이 가장 만만한 약소민족인 우리에게 떠 맡겨진 결과로 야기된 일종의 대리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도 평가되고있다.
6·25참변은 통계적 수치로 표현할 수없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에게는 서울에서 불과 30마일 안팎의 휴전선 북쪽이 세계 어느나라보다 먼 곳이 되어 버렸고, 핏줄을 같이 나눈 동포는 가장 친근하게 지내야 한다는 당위론적 설득 대신 공포와 대결의 대상으로 교육 받아졌던 것이다.
강인하게 유지되고 있던 인습적인 봉건적 전통이 급격하게 해체되고 새로운 문화·사회의 조성기반이 전쟁이라는 변칙적 방법에 의해 이뤄졌다는 역설적인 의미의 긍정적 측면외에 6·25는 공산주의자들의 반인간적 실체가 여지없이 폭로되고 그들의 언행이 얼마나 불일치되고었는가를 확증시켜 준 값진교훈을 남긴것이 그런대로의 수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6·25의 상처와 교훈을 그 정도에서 머무르게해서는 안된다. 수백만의 피흘린 댓가를 어디에선가 진지하게 찾아야 한다. 일천만이산가족의 한맺힌 응어리를 민족사의 발전을 위한 역동적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한다. 수천만이 겪은 참담한 경험들을 민족사를 풍요롭게 하는 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6·25 발발 35주년은 이제 그러한 열린 시각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원한과 비탄, 대결과 복수심리를 용서와 화해로 승화시키는데서 가능할 것이다. 화해와 평화의 요구가 우리민족만큼 절실한곳이 어디 있겠는가.
6·25는 분단민족이 겪은 비극의 극한 점이었다. 이제 그것을 분단극복의 상징적 계기로 수용하는 지혜와 자세가 필요하다. 세계 어느 민족이 이렇게 비인간적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찌기 경험한 적이 있는가. 이 값비싸게 치른 경험은 우리에게 분단극복이 인간화·민주화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치고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인간화를 위한 성실한 역량의 축적이 민족통일을 명분으로 하여 다시 야기될지도 모를 6·25식 동족상잔의 비극을 예방하면서 6·25를 통해 강렬하게 제기되었던 분단극복·민족화해의 과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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