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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성보’ 부처님 치아 모시고 살아있는 듯 정성으로 예불·공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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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호 8 면

기원전 3세기 인도 부다가야에서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지역에 옮겨 심은 보리수. 배영대 기자

‘인도양의 진주’로 불리는 스리랑카. 인도 대륙 동남단에 위치한 이 섬나라는 대소(大小)의 크기로 폄하할 수 없는 특이한 나라다. 국토는 대한민국(남한)의 3분의 2 정도이고, 인구는 2000만 명이 조금 넘으며, 국내총생산(GDP)도 낮은 가난한 나라에 속하지만 불교에 관한 한 그 자긍심이 무궁하다. 불기 2560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 불교문화를 돌아보는 의미가 각별한 것은 그 때문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로 ‘해양 실크로드’의 거점인 스리랑카는 일찍부터 블루 사파이어를 비롯한 각종 보석의 산지로 유명했다. 『신밧드의 모험』에서 신밧드가 보석을 찾아 떠난 세렌디브가 스리랑카다. 이 섬의 가치를 유럽보다 앞서 발견한 아랍인들은 ‘보석의 섬’이라 불렀다. 유럽인들은 이 섬에서 생산되는 후추·계피·차 같은 향료에 매료됐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기자가 이번 답사에서 찾은 스리랑카의 진정한 보석은 불교다.

불치사 안 사리함 앞에 모여 기도하는 참배객들.

아소카 대왕 아들이 전파한 불교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세계 종교로 확산되는 길을 연 나라가 스리랑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대왕의 아들이자 승려였던 마힌다 장로가 불교를 스리랑카에 전했다. 부처님이 세 차례 스리랑카를 방문했다는 설화가 내려올 정도로 초기 불교의 중심지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경(佛經)의 탄생이다. 초기에 부처님 말씀은 대개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졌다. 암송의 천재들에 의한 ‘구전(口傳) 불교’였던 것이다. 구전 불교를 문자화해 집대성한 곳이 스리랑카다.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 중부 마탤리 지역에 위치한 알루비하라 사찰에서 팔리어로 처음 쓰여졌다. 2000년의 세월이 넘게 흐른 오늘날 우리가 경전을 읽으며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시발점인 것이다.


인도양은 제국의 바다였다. 스리랑카는 무려 450년간이나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다.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으로 이어지는 릴레이 통치를 받았다. 전통 불교 문명과 제국주의 문명의 흔적이 착종돼 있다.


불교가 전해질 당시 싱할라 왕족의 첫 수도인 아누라다푸라, 두 번째 수도인 폴론나루와, 마지막 수도인 캔디 지역은 불교 유적의 보고(寶庫)다. 불교 유물의 장대하면서도 섬세함, 그 창의적 수준은 이 나라 전통 문화의 경지를 짐작하게 한다.


오랜 식민통치 기간에 불교 문화가 크게 파괴됐음에도 현재 스리랑카 인구의 약 70%가 불교도다. 불교 유적 어디를 가도 기도하는 불자들을 볼 수 있다. 불교가 구경거리 문화재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그만큼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얘기다. 캔디 지역은 특히 스리랑카의 정신적 고향으로 통한다. 이곳에 ‘불치사(佛齒寺)’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치아 사리(佛齒)를 안치하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불치’는 이 나라의 가장 귀중한 성보(聖寶)다. 스리랑카 국민들에게 불치사는 일생에 한 번은 참배해야 하는 성소로 여겨진다. 기자가 캔디의 불치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넘어설 때쯤이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치사 치아 사리함에 꽃을 올리고 기도를 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모두가 진지한 표정이다. 살아 있는 부처님을 모시는 것처럼 온 정신을 집중해 예불과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었다. 불치사 내부에는 사리함 이외의 불상이 따로 보이지 않았다. 매년 8월이면 불치를 주제로 한 스리랑카 최대의 축제 ‘페라헤라(Perahera·佛齒祭)’가 열린다. 100여 마리의 코끼리가 인도하는 가운데 불치가 불치사 밖으로 나와 거리 축제를 벌인다. 올해도 8월 8~18일 열릴 예정이다.


불치 전래의 역사는 1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 이후 나온 사리가 8개국으로 나눠지는데, 이때 치아 사리 하나가 인도 칼링가 왕국에 이운됐다.


이 치아 사리가 다시 4세기 초 스리랑카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역사서에 따르면 AD 310년 이교도의 침공으로 국가 존망이 위태롭게 된 칼링가 국왕 구하시바가 사위 단타와 헤마말라 공주에게 명을 내려 불치를 모시고 스리랑카로 건너가라고 명했다. 싱할라 왕조의 메가완나왕은 불치를 성대하게 안치한 후 매년 불치를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는 축제를 계획했다고 전한다. 이 행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불치제의 기원이다. 싱할라 왕조가 수도를 이전할 때마다 불치도 함께 옮겨갔고 새로운 수도에 불치사를 세웠다. 불치는 왕권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부처의 보리수나무도 옮겨와 심어또 하나의 성보는 보리수다. 아소카 대왕의 딸이자 마힌다 장로의 동생인 샹가미타 스님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의 보리수를 옮겨와 아누라다푸라에 심었다. 알루비하라 사원의 주지 난다라타나 스님에 따르면 보리수의 전래는 왕실 불교가 대중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향기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은은하게 퍼지며 참배객을 맞는다.


불치가 전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리랑카를 다녀간 중국 스님이 있었다. 최초의 기록까지 남겼다. 동진(東晉)의 법현(法顯·337?~420) 스님이 쓴 『불국기(佛國記)』(혹은 『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에 불치사 기록이 전한다. 서기 399년 일행 10여 명과 함께 수도 장안(長安)을 출발한 법현 스님은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인도로 들어가 약 8년간 체류하며 불교 유적을 순례했다. 이어 409년 사자국(獅子國·스리랑카의 옛 이름)으로 건너가 약 2년간 머무르고 난 뒤 해로(海路)를 통해 중국으로 돌아왔다.


제국주의는 이중적이다. 불교 전통을 탄압했지만 불교가 유럽에 널리 알려진 것도 그 제국주의 시대였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공유하는 우리도 오늘날 『불국기』의 존재 자체를 아는 이가 많지 않을텐데, 프랑스에선 이미 1836년에 동양학자 아벨 레뮤자가 이를 불어로 번역했다. 영어본도 5종이나 나온다. 영국의 동양학자 새뮤얼 빌이 1869년 펴낸 『법현과 송운의 여행기』, 허버트 앨런 자일스가 1877년 펴낸 『법현의 여행 또는 불교도 왕국들의 기록』, 제임스 레게가 1886년 펴낸 『불교왕국들의 기록』 등이다.


19세기 서양에선 『불국기』 같은 책이 이렇게 소개될 정도인데도 당시 조선은 1800년의 정조대왕 서거 이후 망국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동아시아권에서 『불국기』 번역은 유럽보다 휠씬 늦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뤄지는데 일본이 가장 앞섰다. 한국에선 1998년에야 이재창의 『고승법현전』, 2013년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의 『고승법현전』 등이 출간됐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우리가 서양보다 불교를 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부처님오신날의 단상이다.


캔디(스리랑카)=배영대 문화선임기자?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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