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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속으로] 한국 역사에 관심 있어 독학으로 배워…단군신화, 프랑스인도 재미있어 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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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제3인류』 완간 맞춰 방한한 베르베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이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작가에게도 한국은 각별하다. 적어도 지금 누리는 작가로서의 입신(立身)이 상당 부분 한국 독자들의 성원 덕분이어서다. 다른 나라에서보다 한국에서 특히 펄펄 나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55) 얘기다.

그가 한국을 찾았다. 6권짜리 장편 『제3인류』(열린책들)의 완간에 맞춰서다. 1994년 첫 방문 이래 일곱 번째 한국행, 그는 연예인 같은 일정을 소화한다. 프로야구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한 고등학교를 찾아 강연도 한다. 팬 사인회는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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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제3인류』 등으로 한국에서 인기가 높은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다음 작품은 꿈과 수면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사진 열린책들]

13일 간담회를 열어 이번에 완간한 새 소설, 그와 관련해 자연스럽게 화제가 된 인공지능(AI)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인간 두뇌의 신비, 지구의 미래, 삶과 죽음의 경계 등 자연과학의 영역을 그는 적극 소설에 끌어들였다. 80년대 이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재를 찾던 한국 독자들의 ‘요구’와 맞아떨어져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2002년 베스트셀러 『뇌』에는 체스 세계 챔피언인 IBM의 인공지능 딥블루를 깬 과학자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제3인류』는 핵전쟁, 환경 재앙, 고삐 풀린 자본주의, 종교 광신 등 일곱 가지 대재난으로 멸망 위기에 놓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말 그대로 신 종족의 가능성을 찾는 얘기다. 역시 질문은 AI 쪽으로 흘렀다.

구글의 AI 알파고와 인간 기사 이세돌 간의 바둑 대결이 화제였다. AI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알파고는 이번 내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체스판에서 기술 발달의 미래를 낙관하는 파란색 진영의 전형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0년 안에 사람만큼 똑똑한 안드로이드(인간 모습의 로봇)가 나오리라고 본다. 한국은 그 선두에 있는 나라다. AI는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16세기 프랑스 작가 라블레는 ‘의식 없는 과학은 칼날과도 같다’고 말했다. 기계들엔 책임감이 없다. 전쟁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AI가 인간을 무차별 살상한다면 그 책임은 그걸 만든 인간에게 있다. 성경 10계명 중 ‘살인하지 말라(You shall not murder)’는 말씀이 ‘미래형’인 이유는 인류가 언젠가 살상을 일삼은 과거를 뉘우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AI가 소설도 쓴다. 직업을 잃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AI가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일을 대신 해줘 인간이 창의적인 일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로봇의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놀라운 반전 없는 그저 그런 얘기가 아닐까 싶다. 모든 좋은 소설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걸 로봇에 주입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소설 쓰는 로봇에 대해 경쟁의식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의 창의성도 결국 특정한 인식 패턴이 발전한 결과 아닌가.
“인공지능과 인공인식은 다르다. 지금 AI는 지능은 있지만 인식은 갖지 못한 상태다. 지능보다 인식 능력이 훨씬 중요하고 흥미롭다. AI가 스스로를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의 열정을 바칠 만한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가령 안드로이드 예수가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를 전파하는 로봇 예수 말이다.”
『제3인류』 5·6권의 주인공은 한국인 여성이다. 단군신화도 나오는데.
“오래전부터 한국인 주인공이 인류의 진화를 이끄는 내용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한국 여성을 내세워 남녀, 동서 간의 만남을 꾀했다. 한국 역사는 사실 아는 게 없었다. 혼자 독학하다 단군신화에 대해 알게 됐다. 프랑스 독자들에게 알려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바뀌고 있지만 프랑스에서 한국은 아직 너무 덜 알려져 있거나 잘못 알려진 측면이 있다.”
신화 말고 다른 시대 한국 역사에도 관심 있나.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많다. 지도를 펴면 한국은 중국·일본·러시아 같은 위험한 나라들 틈바구니에 있다. 무수한 시련을 겪고도 이토록 눈부시게 성장했다. 경이롭다. 인류의 미래에 관한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런 성공은 교육의 힘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지나쳐 학생들에게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주지만 결국 학생들의 창의성을 끌어내는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글은 주로 언제 쓰나.
“매일 오전 8시부터 낮 12시반까지 쓴다. 공식 스케줄이 없으면 휴가 가서도 쓴다. 글쓰기는 운동과 비슷해 매일 써야 잘 써지고 더 잘 쓰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특히 오전 11시쯤에 글쓰기의 절정에 이른다. 너무 즐거워서 무슨 내용을 쓰는 건지, 뭘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빠르게 타이핑한다. 창의성이 최고조인 시간이다. 좋은 소설에는 그런 주술적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100% 지성만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다른 세계와 커넥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직 컴퓨터는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
다음 작품은.
“꿈과 수면에 대한 작품이다. 꿈을 마음대로 컨트롤해 시간과 공간을 정복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꿈속에서 마음대로 꿈을 통제해 본 적이 있다. 다섯 번 정도. 열정적으로 연구해 볼 만한 분야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출간됐다.”
[S BOX] 전 세계 판매량 2000만 부 가운데 국내서 850만 부…‘한국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책 내줄 출판사를 찾는 데 6년이 걸렸다는 데뷔작 『개미』부터 이번 『제3인류』까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산문은 35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20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중 850만 권을 한국 독자가 샀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는 열린책들 출판사의 홍보 카피가 농담이 아닌 이유다.

그런 인기의 비결은 뭘까. 일단 국내 평단에는 관심의 대상 밖인 듯하다. 평론가들에게 이유를 묻자 “안 읽어 봐서…” “『개미』는 읽어 봤지만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정도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대중소설’로 친다는 얘기다.

“기발하고 흥미 있는 소재에 과학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이 첨가돼 독자들에게 다양한 만족감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이건 열린책들 출판사의 자체 분석이다.

간담회에서도 같은 질문이 나왔다. 왜 그렇게 한국에서 인기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한국은 문맹률이 가장 낮은 국가다. 글 읽는 인구 비중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다. 또 미래 지향적인 나라다. 내 작품이 주로 인류의 진화나 미래가 소재이기 때문에 미래 지향적 한국 국민이 가장 잘 이해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대답 끝에 베르베르는 한 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출판사가 든든하다. 나를 끈끈하게 믿어 줬다.” 마케팅도 성공요인이라는 얘기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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