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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이 만난 사람] “집권 가능성 더 보여주는 당에 호남 민심 따라올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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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정세균 더민주 상임고문



정세균(66)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은 “미안합니다”를 외치며 바쁘게 들어섰다.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718호. 미리 사과 전화를 받았지만 30분이나 기다렸다. 평소와 다르게 무척 바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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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은 11일 국민의당과의 관계에 대해 “(정권교체의) 승률이 높은 것은 통합이라고 생각하지만 잘 되겠느냐. 통합이 안 되면 연대든 단일화든 그런 거라도 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면서 ‘야 3당 정책협의체’를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사진 김현동 기자]

선거운동 하러 다니시나요.
“아니, 공약 이행 때문에….”

더민주가 원내 제1당이 되면서 국회의장을 맡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 바람에 정 고문 외에도 문희상·박병석 전 국회부의장과 이석현 국회부의장, 원혜영 의원까지 5파전이 벌어졌다.

“지역 공약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장관과 오후 1시40분에 만나기로 했는데 상임위가 늦어져서 2시10분에 만났어요.”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그는 1996년 15대 총선 때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으로 고향인 전북 무주- 진안- 장수에서 당선돼 정치를 시작했다. 쌍용그룹에서 상무로 퇴직한 직후다. 이 지역에서 18대까지 내리 네 번 당선된 뒤 서울 종로로 지역구를 옮겨 19, 20대까지 6선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산자부 장관을 역임했고 열린우리당 당 의장, 통합민주당 대표 등도 맡았다.

벌써 공약을 챙기시네요.
“종로에선 지하철 신분당선 서북부 연장선이 있어요. 서울 대부분 지역에 대중교통이 있는데 종로에 사각지대가 있어요. 그리고 창신·숭인 지역은 무자비하게 뉴타운을 지정해 어려움이 많았는데 뉴타운을 해제하고 도시재생사업을 유치했어요. 작은 것도 많이 됐어요.”
골목골목, 동네에 맞는 공약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의정보고 때 민원이 들어오면 그걸 실행하는 노력을 많이 했지요.”

그는 2012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떨어지고 2014년 전당대회 때는 대표 출마를 포기했다.

“‘(당 대표를) 세 번씩이나 했는데 또 나오느냐, 직업적 당 대표냐’, 그래서 그만뒀잖아요.”

여론조사에서는 굉장히 불리한 걸로 나왔었는데.
“이번 선거 때 각 언론사가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은 여론조사기관, 언론사, 정당이 다 알아요. 그런데도 그걸 대서특필하고 공표해서 언론기관의 공신력을 떨어뜨린단 말이에요. 이것은 바로잡아야 돼요.”

 
정 고문은 이 대목에 무척 화가 난 듯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고 한 게 아니야. 다 안단 말이야. 과거 경험으로 봐도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어. 지금은 더해. 젊은이들은 아무도 집전화를 안 써. 그럼 당연히 틀린 거 아니야. 제 경우 여론조사에서는 17.3% 뒤지는 걸로 나왔는데 실제로는 12.7%를 이겼어요. 어떻게 진폭이 30%가 되느냔 말이에요.”

정당이 공천에도 여론조사를 이용하잖아요.
“한심한 거죠. 그거 한심한 거예요. 돈도 엄청 많이 썼을 거야. 다 국민 세금입니다. 이건 제도 개선을 꼭 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요.”
더민주가 호남에서 패배한 원인은 뭐라고 봅니까.
“아… 저는 기득권자에 대한 심판이라고 봐요. 새누리당은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심판을 받았고, 호남은 더민주가 기득권 정당 아닙니까. 호남에서 심판 받았지요. 특히 우리가 정권교체에도 실패하고, 확실한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지역을 위해 뭔가 뚜렷한 성과를 내지도 못하고, 그러니깐 거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죠.”
호남에서는 현역 의원들이 대거 당선됐는데.
“(웃으며) 옷을 갈아입고 나간 걸 새롭게 보셨다고 봐야지요. 유권자에게 이중성이 있어요. 현역들한테는 ‘아, 이제 이 사람도 좀 낡았다, 바꾸자’, 그러면서 또 새로운 사람을 내놓으면 ‘이것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누구야’, 이래요. 그걸 잘 조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우리 당 선거 전략이나 공천이 실수를 하니깐, 저쪽(국민의당)이 반사이익을 본 측면이 있다고 봐요.”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거부도 있지 않았나요.
“그것도 하나죠, 전부가 아니고.”
다시 호남 민심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보기에는 우선은 수권능력을 보여줘야 되고, 집권 가능성을 보여줘야 되고, 두 번째는 좀 더 효과적으로 소통을 해야 돼요. 그 다음에 호남이 오랫동안 낙후됐다, 피해를 봤다, 이런 생각을 어느 정도 불식시켜 줄 수 있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지요.”
문 전 대표의 호남 방문에 대해선 김종인 대표와 평가가 다른데.
“선거 때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한데… 당하고 조율을 해 합의해서 가든지, 합의가 안 되면 안 가든지 그랬어야 했는데, 합의가 안 됐는데 가서 잡음이 생겼어요. 당도 손해고, 본인도 손해고….”
요즘 문 전 대표가 호남 가는 것도 이견이 있던데.
“아… 글쎄요. 정면돌파 하는 방법도 있고, 우회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것은 사람마다 취향이라고 생각해요. 나 같으면 정면돌파보단 우회적인 방법을 쓰지요.”
정권교체 가능성부터 보여주라는 거죠.
“그렇죠. 더민주가 국민의당과 경쟁하는 거예요. 누가 집권 가능성을 더 보여주느냐의 경쟁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호남에선 정권교체를 강력하게 원하는 거 아니에요? 과거에 정권교체 실패한 것에 대해 아주 가슴 아파해. 바로 그거예요. 그걸 채워주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깐 어느 당이 집권 가능성을 더 보여주느냐, 거기에 따라 민심이 오고 갈 거라고 보는 거죠.”
국민의당과 대선 때까지 경쟁하며 갈 수도 있고, 통합해 가는 방법도 있고, 아예 3당 체제로 가는 길도 있는데.
“승률이 높은 것은, 저는 통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게 잘 될까. 통합이 안 되면, 연대든 단일화든 그런 거라도 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저는 야 3당이 정책협의체를 운영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는 거죠.”

이 대목에서 그는 손을 들어 흔들며 강조했다.

“통합을 하든, 연대를 하든, 단일화를 하든 그걸 할 수 있는 토양은 지금부터 만들어가야지, 그냥 무한경쟁에 돌입하는 것은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그만큼 낮추는 것이다. 그래서 승률을 높이기 위해 각 당 지도부가 정말 겸허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소수당은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아니, 그러니깐 거기서 자기 목소리 내고 싶은 것은 따로 내라는 것이지, 합의가 안 되는 것은.”
일부에서 청문회 얘기를 꺼내는데.
“그런 것은 조용하게 추진하면 될 일이에요. 위기 극복하고, 국민 걱정하고, 민생 챙기는 걸 먼저 보여준 다음에 다른 한쪽에서 청문회 하고, 잘못된 놈 따지고, 당연히 해야죠. 그런데 이걸 앞세우면 정작 제대로 해야 할 일은 못하면서 싸우기만 한다고 국민들이 짜증 내고 실망만 하죠.”

그는 대권과 국회의장, 당권 후보로 모두 거론된다.

결심은 하셨나요.
“원 구성 협상 결과가 나오는 걸 보면서 해야지. 서두를 일은 아니잖아요. 국민의당이 변심할… 변심은 아니지… 여소야대를 만들어준 민심을 깰 가능성은 없지만 혹시 국민의당이 저쪽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제1당에 국회의장 온다면 도전하실 생각인가요.
“아… 뭐 결정은 안 했지만… 그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지요.”
국회의장을 한 뒤에는 대부분 정치를 그만두셨는데, 아쉽지 않나요.
“정치를 얼마나 오래 하느냐, 어떤 자리에 오르느냐보다 무슨 일을, 어떤 성과를 내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이번 기회야말로 의회 권능을 제대로 회복할 때죠. 그런 국회 모델을 만들 수 있다면 저는 그 기간이 짧더라도 훨씬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20대 국회는 무얼 고쳐야 합니까.
“우선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복원되어야 해요. 여야 간에 대화가 실종됐어요. 이제 그걸 좀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S BOX] 어릴 적 지게 지고 화전 일군 ‘진짜 촌놈’

정세균 상임고문은 별명이 ‘진촌’이다. ‘진짜 촌놈’이란 말이다. 외모는 깔끔한 신사다.

그는 6·25 발발 3개월 뒤인 1950년 9월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기억은 지게질과 밀기울, 화전과 굶주림이다. 초등학교를 1년 조기 졸업한 뒤 어머니와 화전을 일구며 나무뿌리를 캐느라 손목이 얼얼했던 장면이 박혀 있다.

아버지는 집안살림은 뒷전인 한량이었다. 약방을 했고, 전쟁 직후 민주당 소속 면의원을 한 번 했다. 어머니는 남편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전통적인 여성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무를 하면서 1년을 보냈다. 아버지를 졸라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고 2년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또다시 나무를 하고 지게를 지는 생활을 했다. 취직이 보장된다는 말에 전주공고에 입학했다. 공고에서 전체 1등을 한 뒤 그는 전주신흥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장학금을 달라고 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2학년은 매점에서 빵을 파는 일을 하며, 3학년 때는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다. 고려대 법대는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 고학했다. 그 와중에도 학보사 기자와 총학생회장을 했다. 유신 때문에 사법고시를 포기했다.

그는 총장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가기로 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지광고 사태가 나면서 무산됐다. 이 바람에 쌍용에 입사했다. 총학생회장 시절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니던 부인 최혜경씨를 만났다. 부인은 경북 출신이다.

김진국 대기자 kim.jinkook@joongang.co.kr
정리=위문희 기자
사진=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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