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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강유정의 까칠한 시선] 스크린 싹쓸이한 ‘시빌 워’, 다양성 말라붙은 한국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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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DB]

시작부터 기록이다. 개봉 첫날 72만8000명에 가까운 관객이 들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50억원에 육박한다. 지금까지 개봉 당일 관객 수는 68만2701명을 모은 ‘명량’(2014, 김한민 감독)이 최고였다. 신기록을 경신한 작품은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4월 27일 개봉, 앤서니 루소·조 루소 감독, 이하 ‘시빌 워’).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마블 영화가 새로운 기록을 세운 사실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다. 이제 매년 5월은 할리우드발 블록버스터를 위해 비워 둔 노른자 자리, 한국영화가 으레 개봉 시기를 피하는 접근 금지 구역으로 합의된 듯하다.

강유정의 까칠한 시선

언제부터였을까? 시작은 마블 영화의 국내 흥행과 맞닿아 있다. 2000년 ‘엑스맨’(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후 마블의 자매 캐릭터가 하나둘씩 한국 극장가에 방문 횟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마블 캐릭터가 스크린에서 견고하게 팬덤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2008년 ‘아이언맨’(존 파브로 감독) 개봉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라는 수퍼 히어로를 통해 낯설고 어색했던 마블 코믹스의 영웅들이 친밀한 영화 캐릭터로 관객에게 다가간 것이다. 아이언맨의 인기는 그동안 그다지 관심받지 못했던 캡틴 아메리카나 헐크 같은 캐릭터까지 주목하게 만들었다. 이는 비단 마블 영화에만 그치지 않고, 소니 픽쳐스가 영화화 저작권을 보유한 ‘스파이더맨’ 시리즈(2002~)와 DC 코믹스가 원작인 작품에도 유사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더니 어느새 5월은 기술응축형 수퍼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시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올해 개봉 패턴을 보면, 그 격전의 시간이 조금 더 앞당겨졌음을 눈치챌 수 있다. 물론 ‘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의 시작’(3월 24일 개봉, 잭 스나이더 감독)은 대단한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시리즈의 서막임을 감안하면 아마 이후 DC 영화들은 내년 봄에도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사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관습적인 문제로 넘기는 사이 세월이 흘렀고, 한국영화의 다양성은 아예 고사 직전에 놓여 있다."

한국 영화 시장에서 매년 4월은 비수기라 불린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4월에 의외의 성공작이나 흥행작들이 발견되곤 했다는 점이다. 2012년 3월에 개봉해 흥행세를 쭉 이어 간 ‘건축학개론’(이용주 감독)과 같은 작품이 그 예다. 한국형 텐트폴 영화(Tentpole Movie·흥행 가능성이 높은 영화)가 부재한 가운데, 비교적 작은 규모의 영화가 관객의 눈길은 물론 사랑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어벤져스’ 시리즈(2012~)를 볼 사람들은 다 보게 마련이다. 1년에 극장 한 번 가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수퍼 히어로 영화는 챙겨 볼 수 있다. 보통 중·고등학교 중간고사 끝날 무렵 개봉한다는 점도 무시하기 힘든 흥행 요인이다. 게다가 12세 이상 관람가 아닌가. 이처럼 가족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은 흥행에 장점으로 작용한다. 심각한 문제는, 이와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강력한 흥행성을 앞세워 대다수의 스크린을 싹쓸이하듯 차지한다는 점이다. ‘시빌 워’는 개봉 첫날 1863개 스크린에서 무려 9065회 상영됐다. 극장마다 거의 10분 간격으로 상영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문제는, ‘시빌 워’ 외에 다른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의 권리다.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러한 관객에게 도무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존중되어야 할 다양성이 반드시 한국 독립영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매머드급 블록버스터가 상영관을 차지함으로 인해 가장 위축되는 것은, 바로 제작비 20~30억원가량이 투입되는 중간 크기의 다양한 장르 영화들이다. 즉, 한국형 블록버스터 범주에 속하지 않는 로맨스·코미디·드라마 장르 영화들의 설 곳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한국 시장도 텐트폴 영화 중심으로 제작 트렌드가 바뀌었다. 4월이나 5월에는 할리우드 영화에 자리 내주고, 극장가 성수기인 여름·겨울과 명절 시즌에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밀린다. 실제로 중소 규모 영화의 부재는 징후를 넘어 체감되기 시작했다. 사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이제는 선도가 떨어진 상투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한다. 너무 뻔해졌으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는 걸까? 이렇듯 관습적인 문제로 넘기는 사이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한국영화의 다양성은 아예 고사 직전에 놓여 있다. 어떤 문제든 골든 타임을 넘기면 회생하기가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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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허구 없는 삶은 가난하다고 믿는 서사 신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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