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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멘탈·코스 매니지먼트 섭렵, 승부 경쟁력 뛰어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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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5면


“올 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는 한국 선수들이 지배할 것이다.”


지난 3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열린 JTBC 파운더스컵. 미국골프채널에서 30년 동안 LPGA투어를 취재한 골프 칼럼니스트 렌달 멜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예상대로 올 시즌 LPGA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의 활약은 놀라울 정도다. 한국은 올 시즌 열린 11개 대회에서 5승을 올렸다. 장하나(24·비씨카드)가 2승, 김세영(23·미래에셋)·김효주(21·롯데)·신지은(24·한화)이 각각 1승을 거뒀다. 한국 선수들의 라이벌은 한국계 선수들이다. 한국계 선수도 똑같이 5승을 거두면서 투어를 장악하는데 앞장섰다.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19·뉴질랜드)와 노무라 하루(24·일본)가 각각 2승, 이민지(20·호주)가 1승을 거뒀다. 한국 또는 한국계가 아닌 선수의 우승은 혼다 타일랜드의 렉시 톰슨(21·미국)이 유일하다.


같은 골프 DNA 가진 한국과 한국계 선수들국내 골프 전문가들은 한국 여자 골퍼의 LPGA투어 점령은 “예고된 일이었다”고 말한다. 노무라 하루, 신지은을 지도하고 있는 한화 골프단의 김상균 감독은 이렇게 평가했다. “과거에는 스윙이나 테크닉을 중시했다. 그러나 이제 스윙의 기본은 골프를 시작하고 1~2년이면 다 끝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수들은 20세가 되기 전 멘탈과 코스 매니지먼트까지 두루 섭렵한다. 매주 코스에 맞는 샷 구질과 퍼팅 스트로크를 바꿔가면서 전략적으로 준비하고 들어가는데 외국 선수들이 따라올 수가 없다.”


1998년 박세리(39·하나금융그룹)의 미국 진출 이후 2000년대 초·중반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 선수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국내와 다른 생소한 코스에 대한 적응 문제였다. 골프는 예민한 운동이기 때문에 잔디에 따라 공을 치는 타구감이 달라지고 샷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엔 코스 적응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선수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 선수의 아버지는 “요즘은 시행 착오에 대한 학습을 미리 다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기 때문에 적응에 두려움을 느끼는 선수는 없다. 가장 어려운 상황까지 예측하면서 골프를 하는데 외국 선수들과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국계 선수들도 다를 바가 없다. 국적만 한국이 아닐 뿐 그들의 골프 DNA는 한국이기 때문이다. 리디아 고나 이민지, 노무라 하루의 공통점은 한국식으로 골프를 배웠다는 것이다. 이민지는 티칭 프로 출신인 한국인 어머니에게, 노무라 하루는 한국인 외삼촌에게 골프를 배웠다. JTBC골프 임경빈 해설위원은 “한국 선수나 한국계 선수나 골프의 근원은 같다. 부모들의 헌신적인 지원, 코치와의 맹훈련을 통해 비슷한 스윙 매커니즘, 승부 근성을 가진 선수로 자란다. 한국계 선수들도 필드 안에서는 한국인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한국계 선수들은 2년 전인 2014년 상반기만 해도 지금과 상황이 달랐다. 한국은 상반기 18개 대회에서 1승을 거두는데 그쳤다. 반면 미국은 8승을 거뒀다. 1998년 박세리 이후 한 때 40명이 넘는 한국 선수가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국내 투어의 성장과 맞물려 미국 무대를 외면하는 선수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위기론’까지 대두됐다.


이런 분위기를 바꾼 건 김효주였다. 김효주가 초청 선수로 출전한 시즌 마지막 메이저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LPGA투어 진출을 선언하자 김세영·장하나 등 국내 톱 클래스들도 김효주의 뒤를 따랐다. 지난 해부터 신예들의 가세로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통산 17승을 거둔 박인비(28·KB금융그룹) 혼자 이끌어가던 모양새가 달라졌다. 최운정은 지난 해 마라톤 클래식에서 투어 데뷔 7년 만에 우승했다. 신지은은 아메리카 텍사스 슛아웃에서 6년 만에, 노무라 하루는 데뷔 5년 만에 호주여자오픈에 이어 스윙잉 스커츠 클래식까지 두차례 우승을 거뒀다. 한 골프계 관계자는 “5년 이상 투어에서 활동하고도 우승을 하지 못했던 2진급 선수가 우승했다는 것은 큰 의미다. 우승을 못했던 선수들 사이에서도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이제는 LPGA투어에서 활약하는 30여명의 선수 누구나 우승 후보라는 것이다.


한국(계) 선수들의 강세는 외국 선수 가운데 뚜렷한 강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은 톰슨만이 제 몫을 해내고 있을 뿐 에이스들의 하향세가 뚜렷하다. 2014년까지 11승을 거뒀던 미국의 에이스 스테이시 루이스(31)는 2년 째 한국 선수들에게 막혀 우승하지 못했다. 폴라 크리머(30)와 브리타니 린시컴(31)은 결혼 이후 주춤하다. 신예인 브룩 헨더슨(19·캐나다)이나 찰리 헐(20·잉글랜드) 정도가 눈여겨 볼 선수로 분류되지만 이들 역시 한국(계) 선수들에 비하면 덜 다듬어졌다는 평가다.


LPGA 투어 중심 아시아로 이동하나한국(계) 선수들의 맹활약을 바라보는 미국 골프계의 시선은 복잡하다. LPGA투어에서 활동했던 양영아(38)는 “한국 선수를 비롯한 아시아 선수들이 잘 하고 미국 선수들이 부진하면 미국 기업의 후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투어가 세계화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겠지만 미국 골프계로서는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LPGA투어는 2011년 경기 불황 여파로 투어 수가 23개까지 줄어드는 위기를 맞았다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기업의 후원으로 다시 일어섰다. 올해는 역대 최다 상금(6310만달러·약729억원)을 걸고 33개 대회가 열린다. 이 중 아시아 기업이 메인 스폰서를 맡은 대회는 14개나 되고, 그 중 5개는 한국 기업이 후원하는 대회다.


LPGA 마이크 완 커미셔너는 아시아 선수들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 “아시아 선수들의 활약으로 투어가 다시 재건됐다. 아시아 선수들은 과거 소통과 투어 적응에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박인비나 최나연·유소연 같은 선수는 언론·팬·스폰서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교류한다. 아시아 선수들은 경기력과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투어에 도움이 되는 존재다.”


한국 선수들은 지난해 32개 대회에서 15승을 거두며 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한국계 선수의 우승을 더하면 21승으로 이 역시 최다승 기록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지난 해를 뛰어넘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한화 김상균 감독은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한국(계) 선수들이 올해 25승 이상을 거두지 말란 법도 없다. 상황이 계속 이렇게 흘러간다면 미국에서 일부 대회가 열리고 대부분의 대회를 아시아에서 치를 수도 있다. LPGA투어의 중심은 아시아로 넘어오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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