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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디테일의 재발견] '캐롤'의 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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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2015, 토드 헤인즈 감독)에서 테레즈(루니 마라)는 사진을 찍고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피사체가 된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이 일상적 관계는 두 사람에겐 중요한 사건이 되며, ‘사진’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테레즈와 캐롤이 처음 만나는 곳은 백화점이다. 캐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왔고, 테레즈는 장난감 코너에서 일하고 있다. 캐롤은 ‘브라이트 베시’라는 인형이 있는지 묻고, 테레즈는 “안타깝지만 동났다”고 말한다. 이때 캐롤은 핸드백에서 사진을 꺼내 테레즈에게 보여 준다. 딸 린디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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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면에 딸 사진을 보여 준다는 건 친근감의 표현이며, 이후 그들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질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테레즈는 캐롤에게 “눈이 닮았다”고 말하고, 캐롤은 태레즈에게 린디 나이 때 뭘 갖고 싶었는지 묻는다. 테레즈는 “장난감 기차 세트”라고 말하고, 캐롤은 사러 왔던 인형 대신 그걸 구입한다.

이 장면은 이후 캐롤이 테레즈의 작은 아파트를 찾아왔을 때 환기된다. 벽엔 테레즈가 찍은 사진들이 붙어 있다. 테레즈가 찍은 캐롤의 모습도 있다. 그리고 바로 아래 어릴 적 테레즈의 사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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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은 그 사진을 한참 바라본다. 이곳에 오기 전 캐롤은 변호사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와 이혼 소송 중이다. 하지는 접근 금지 명령을 청구했고 캐롤은 심리가 열리기 전까지 딸을 볼 수 없다. 남편은 단독 양육권을 청구할 예정인 듯하다. 딸을 잃을 위기에 처한 캐롤. 그의 눈에 들어온 테레즈의 어릴 적 사진은 린디를 연상시켰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캐롤이 테레즈의 집에 오면서 새로 나온 카메라 세트를 선물로 사 왔다는 사실이다. 테레즈는 어릴 적 장난감 기차 세트를 가지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캐롤은 그 대용품으로 카메라 세트를 사 온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사진은 좀 더 의미심장하게 작용한다. 테레즈는 인물 사진을 찍지 않는다. 찍더라도 뒷모습이나 신체 일부를 찍을 뿐이다. “사람을 찍으려면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는 그녀의 말에, 친구인 대니(존 매가로)는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 왜 끌리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어. 우린 끌리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뿐이야.” 이것은 테레즈와 캐롤의 관계이며, 이 말에 용기를 얻은 듯 테레즈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고 있는 캐롤의 모습을 뷰파인더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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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은 테레즈의 렌즈 앞에 선 최초의 ‘인간’이며, 이후 ‘테레즈-캐롤’은 ‘포토그래퍼-피사체’ 관계가 된다.

그들의 관계는 지속되지 못한다. 이별 후에 테레즈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캐롤을 찍은 필름을 인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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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들은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들을 복기하게 한다. 이때 ‘뉴욕타임즈’에서 일하는 대니는 우연히 그 사진을 보고, 테레즈는 그 인연으로 신문사 사진부에서 일하게 된다. 캐롤이 사 준 카메라로 캐롤을 모델 삼아 찍은 사진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셈이다.

흥미로운 건 토드 헤인즈 감독이 ‘캐롤’을 찍으면서 루스 오킨, 헬렌 레빗, 에스더 버블리, 비비안 마이어 등 여러 사진작가의 작품을 참조했다는 것. 그들 중 하나가 솔 라이터다. 헤인즈 감독은 특히 라이터가 유리창을 통해 찍은 사진에, 반사된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묘한 질감에 큰 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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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캐롤’엔 캐릭터들이 창을 통해 서로 바라보는 이미지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것은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매커니즘과 마찬가지다. 렌즈 뒤의 테레즈와 그 앞에 선 캐롤. 영화 ‘캐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로 끌린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친밀감과 그 거리감을 카메라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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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프리랜서 8년차, 매년 개봉하는 우디 앨런 영화가 유일한 인생의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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