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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탈리도마이드를 떠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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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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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런던특파원

“○○○은 임산부와 수유기 여성에게 완벽하게 안전하다. 아이와 어머니에게 부작용이 없다.” 떠오르는 게 있을 수 있다. 이 광고 문구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약화(藥禍) 사고의 대명사인 탈리도마이드다. 서독의 그뤼넨탈이 1957년 수면제로 내놓았고 입덧약으로도 널리 처방됐으나 61년 기형아를 야기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시장에서 철수한 약이다. 전 세계 46개국에서 팔렸다.

미국만은 예외였는데 식품의약국(FDA)의 한 전문가가 시판 허가를 여러 차례 거부해서다. 이 경우엔 미국이 모범 사례다. 다른 나라들은 좀 달랐다.

당장 서독에선 탈리도마이드가 의사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약으로까지 분류됐다. 5000명 이상의 기형아가 태어났다. 68년 그뤼넨탈의 8명이 형사법정에 섰으나 누구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72년 관련 피해자 기금이 마련됐는데 그뤼넨탈이 1억1400만 마르크, 서독 정부가 1억 마르크를 출연했다. 전문가의 판정을 거쳐 2800명 정도가 배상을 받았거나 받고 있다. 그뤼넨탈은 2008년에도 5000만 유로를 추가 출연했다.

막상 그뤼넨탈이 사과한 건 2012년의 일이다. “탈리도마이드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회사의 역사에서 항상 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와 가족들에겐 이 50여 년이 질곡 같았을 게다.

스페인 당국은 70년대까지 자국 내에서 탈리도마이드가 유통되는 걸 몰랐다. 피해자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2013년 그뤼넨탈을 상대로 한 1심 소송에서 승소했으나 그뤼넨탈이 불복했다. 지난해 최종심에선 피해자들이 졌다. 보상 시효가 지났다는 게 이유다.

누군가 이번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두고 ‘선진국 대 후진국’ 프레임으로 자조하는 걸 봤다. 그렇지 않다. 선진국들도 진상 규명과 보상을 위해 참으로 고통스럽고도 먼 길을 걸었고 또 걷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그 못지않은 용기와 인내·끈기가 필요하게 된 게다.

참고로 서독에서 그뤼넨탈이 ‘무죄’였던 건 규정을 어긴 게 없어서였다. 당시 과학적 믿음은 어떤 약물도 태반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태아 규정이 미비했다. ‘나쁜 놈이어서 나쁜 일을 저질렀다’는 게 아닌 때도 있다는 의미다. 때론 지식의 한계, 방심이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쩌면 장기전을 앞둔 우리에겐 분노 못지않게 냉철한 이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FDA는 98년 탈리도마이드 시판 허가를 했는데 나병 치료제로다.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