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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 자소서에 부모 얘기 왜 못 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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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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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미국 로스쿨에 가려면 LSAT(법대입학시험) 점수, 학부 성적표, 추천서와 함께 자기소개서(자소서)를 제출해야 한다. 미국에서도 자소서가 당락에 결정적인지라 관련 지침서도 숱하다.

한데 이런 글에 빠지지 않는 주의사항이 있다. “그저 ‘부모가 법률가라 지원하게 됐다’는 식으로 절대 적지 말라”는 경고다. “뚜렷한 소신 없이 부모의 피상적 삶만 보고 지원한다”는 부정적 인상을 준다는 거다.

국내 법학전문대학원(법전원)에 가려면 법학적성시험(LEET) 점수, 학부 성적에다 자소서 역시 내야 한다. 다만 법전원 자소서엔 부모와 친·인척 스펙을 절대 적어서는 안 된다. 같은 법조계 인사나 고관대작의 자녀임을 알면 높은 점수를 줄 거라는 우려 탓이다. 같은 패거리끼리는 무조건 봐주려 할 거란 불신의 산물이다.

하지만 세상이 썩기만 한 건 아니다. 정상적인 회사 간부나 법전원 교수라면 실력 없이 온실에서만 큰 응시생을 뽑았다간 중도에 탈락한다는 걸 잘 안다. “부모가 법조인이라고 밝힌 수험생에 대해 심사위원 대부분이 호감보다는 거부감을 느꼈다고 했다”는 게 한 서울대 법전원 교수의 전언이다.

자소서란 말 그대로 자기를 소개하는 글이다. 그런데도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떻게 컸는지 쓰면 안 된다니 이런 모순이 없다.

훌륭한 인권변호사의 아들이 가난 속에서도 정의를 위해 헌신한 아버지의 삶에 감명받아 법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치자. 초심이 흔들리지 않는 한 훌륭한 법률가가 될 게다. 하지만 현 시스템으론 이런 응시생의 사연도 써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왜곡이 사회적 불신에서 비롯된 부작용이다. 의심에 전 나머지 공사판 노동자 아들보다 법조인 자녀를 무조건 선호할 걸로 여론은 단정하는 듯하다. 하지만 고된 삶을 이겨 낸 수험생의 감동적 성장기는 더 높은 점수를 받을 공산이 크지 않나.

최근 로스쿨 자소서에 부모 및 친·인척 스펙 언급 금지 규정을 어긴 합격자들로 논란이 일었다. 규정 위반은 잘못이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관련 규정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부모 얘기도 맘껏 하되 어설프게 했다간 도리어 점수가 깎이는 그런 체제로 가는 정공법이 정답 아닐까. “구성원 간 불신이 클수록 불필요한 비용은 늘기 마련”이라는 게 사회적 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한 세계적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통찰이다. 법전원 자소서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은 막아야 한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