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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순간 중앙은행은 양날의 칼

중앙일보

입력

새로운 말이 탄생했다. ‘한국적 양적완화(QE)’다. 이 말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강봉균 전 새누리당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 그는 올 4·13 총선 직전 한국적 양적 완화를 제시했다. 경제 활성화 대책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부터 논란이 됐다. 1970년대 ‘한국적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인지 아닌지 논쟁거리였듯이 한국적 양적 완화가 QE인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애초 강봉균 위원장은 “중앙은행이 나서서 막혀 있는 돈의 흐름을 뚫어줘야 한다”며 “한국은행이 산업은행이 발행하는 채권을 사들여 구조조정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 분석가들은 강 위원장 아이디어가 효과를 낼지 여부를 일단 접어뒀다. 대신 “그게 QE 맞아?”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IGE) 이사장은 “엄밀히 말하면 국책은행에 대한 중앙은행 출자”라며 “강 위원장이 선거철이어서 고용에 영향을 주는 구조조정을 입에 올리기 어려워 한국적 양적 완화란 말을 만들어낸 듯하다”고 설명했다.

여당이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논란은 잦아드는 듯했다. 하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고 양적 완화 논란이 부활했다. 지난달 26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앙 언론사 편집?보도국장과 대화에서 그 말을 입에 올린 게 계기였다. 이후 논쟁은 전문가 영역을 떠났다.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 사이 논쟁으로 비화했다.

이제 쟁점은 한국적 양적 완화의 의미가 아니다.‘중앙은행의 역할이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로 바뀌고 있다. 중앙은행은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다. 금융위기 때 또는 그런 조짐이 있을 때 중앙은행은 발권력을 동원해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뚯이다. 쟁점의 핵심은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이 아닌 특정 금융회사를 통해 특정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게 옳은지 여부다.

낯선 논쟁이지만 그렇다고 최초는 아니다. 금융 역사를 되돌아 보면 비슷한 입씨름이 발견된다. 대공황 원년인 1929년에 그랬다. 그해 11월 영국에선 ‘맥밀런 위원회(Macmillan Committee)’가 구성됐다. 스코틀랜드 출신 변호사인 휴즈 맥밀런이 위원장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위원회는 ‘대공황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꾸려졌다. 위원회의 주인공은 맥밀런이 아니었다. 로버트 헤철 미국 리치몬드연방준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칼럼에서 “주인공은 경제학자 메이너드 케인스와 당시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 총재인 몬테규 노먼이었다”고 설명했다.

케인스는 위원회 멤버였고 노먼은 증인이었다. 케인스는 공격하는 쪽이었고 노먼은 방어하는 편이었다. 케인스는 “영란은행이 영국 기업들에 자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노먼은 “영란은행은 특정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맥밀런 위원회가 꾸려진 1929년 11월 미국 재무부는 주가 대폭락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연방준비제도(Fed)는 그즈음 통화긴축에 나서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독일은 한 술 더 떠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히틀러 세력이 준동했다.

그런데 영국이 미국이나 독일보다 대공황 고통을 더 크고 깊게 겪어야 했다. 왜 그랬을까. 영국 통화역사가인 글린 데이비스는 『화폐의 역사』에서 “미국과 독일의 중앙은행은 1932~34년에 과감하게 행동했지만 영란은행은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맥밀란위원회가 제시한 대책 가운데 하나가 영란은행이 출자해서 은행(상공금융회사)을 설립하라는 것이다. 시중은행이 돈 꿔주기를 꺼리는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논란이 일었다. 중앙은행이 민간 기업을 지원하는 게 적합한지에 대한 갑론을박이었다. 결국 시간을 끌다 상공금융회사(ICFC)는 2차대전 직후에 세워졌다. 전쟁 특수 때문에 대공황의 상흔이 거의 사라진 시점이었다.

반면 미국은 1933년 금본위제를 사실상 폐기했다. Fed가 금 보유량과 상관없이 달러를 찍어낼 수 있게 됐다. 당시 Fed 의장인 유진 메이어는 찍어낸 달러를 활용해 공격적으로 미 국채를 사들였다. 대공황 시절 양적 완화였다. Fed가 채권을 사면서 제공한 자금을 활용해 재무부는 부흥금융공사(RFC)를 설립했다. 주정부 공공사업을 지원하고 농업인의 자금난을 해결해주기 위해서였다. RFC는 2차대전 와중에 군수회사를 지원하기도 했다.

독일은 미국보다 한 술 더 떴다. 히틀러 집권 직후인 1934년 당시 사실상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의 총재인 햘마르 샤흐트가 비상대권을 잡았다. 필요할 경우 상거래·무역·관세·자본시장·외환거래 등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샤흐트는 67년 펴낸 회고록인 『돈의 마술(The Magic of Money)』에서 “20년대 후반 미국 자금이 흘러 들어 독일의 주식과 주택 가격을 급등시켰다”며 “이런 투기적 분야로 자금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 대신 일자리가 생기는 분야로 자금을 집중했다”라고 밝혔다. 아우토반(고속도로) 건설, 제조업 활성화 등에 자금이 집중된 이유다.

하지만 중앙은행은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기대한 효과보다 부작용을 낳기 일쑤다. 영국 통화역사가인 데이비스는 “1920년대 초반 독일의 살인적 인플레이션은 독일 정치인들이 지나치게 중앙은행에 의존하다 빚어진 화폐 참사”라고 비판했다.

독일은 1921년 본격적으로 전쟁 배상금을 영국과 프랑스에 지급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 등이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독일 수출이 급감하면서 외환 보유액이 줄었다. 당시 독일 정치인들은 긴축을 통해 내수를 줄여 경상수지를 흑자로 만드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 길을 가면 기업 파산과 실업, 정치적 반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간편한 길을 선택했다. 종이 돈을 마구 찍어내 외환시장에 팔아 외화를 조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바람에 금화 1마르크의 가치가 2년 새에 종이돈 1조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독일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견디지 못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화폐개혁 실무 책임자였던 햘마르 샤흐트는 『돈의 마술』에서 “정치인들이 중앙은행을 활용하면서 미뤄뒀던 긴축이 화폐 개혁 순간에 강력하게 이뤄졌다”고 말했다. 인플레 사냥이 한창이었던 1924~25년 독일에선 기업 파산과 실직이 급증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에서 “요즘 서방 정치인들한테서 비슷한 심리가 엿보인다”고 지적했다. 증세와 구조조정, 시장개혁(공정거래 확보) 등 정치적 저항이 큰 일을 하기보다 중앙은행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심리가 엿보인다는 얘기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그 원인이 바로 정치 리더십 취약"이라고 전했다. 정치인들은 글로벌 기업이 두려워 증세를 언급하지 않고, 일반 시민의 반발을 우려해 구조조정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들은 나라살림이 곤궁해진 정부를 대신해 제로금리, 양적완화, 마이너스 금리 같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경제 살리기에 애썼다. 하지만 중앙은행 만의 도전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나?"라는 질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톰슨로이터 등 서방 언론은 ‘새로운 정책조합(New Policy Mix)’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통화와 재정 정책의 융합이다. 한국은행과 기재부가 손 잡고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다. 말은 그럴 듯하다.

하지만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정책 가치와 목표, 수단 등을 놓고 통화와 재정 정책 책임자의 견해가 일치하기 힘들어서다.

사공일 이사장은 “이런 때일수록 정책 담당자가 해야 할 일은 현실 진단과 치유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라며 “논란이 되는 말을 만들거나 사용해 오해와 논란을 일으키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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