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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2)-출판의길40년(45)|조선시대의 금서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해방 후의 출판이야기로 넘어가기전에 우리 역사에서의 금서정책과 일제시대에 저작가 출판 서적계를 탄압함으로써 조선인의 창작적 의기를 무참하게 꺾어 놓은 금서정책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하의 출판법은 누구든 출판을 하려면 미리 고본을 첨부하여 허가를 받지않으면 불가능했다.
사전검열로 원천적으로 창작의 의기를 저상시켰다할 것이다. 이런 현상의 실증은 일제하의 인기도서가 고작 고대소설과 신소설류의 「빨간딱지」책, 유행가집, 편지쓰기책, 일어자습서류와 과도적으로 남아있는 서당의 교재로 쓰이는 『천자문』『소학』등 한서, 그리고 기능적인 도서라고는 『생활편람』등이 해마다 계속 팔려나간 책들이었다는 당시 서점주인의 회고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출판이란 새로운 정신적 창작적 소산을 발굴해 나가는 힘든 작업이란 올바른 인식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하고 모방에 그치는 작업으로 생각하는 전시대적인 인식이 아직도 상존함이 그 여파라고 보는 것이다.
다 아는바대로 금서의 개념은 위정자나 또는 종교의 권한으로 발행 수입 판매 소지 열독등을 강제적으로 금지하는 행위와 또 그에 해당된 도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의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학자들의 정치비판을 금지하기 위하여 중국 진시황이 저지른 「분서갱유」라는 것이다. 근대에 와서는 독일 나치정권에 의한 분서가 있다. 분서와 같은 일시적 금서방식과는 달리 정책에 의한 금서의 유례라면 제2차대전에 승리한 미군이 일본점령정책으로 기왕에 출간된 군국주의적 사상서의 발행을 금지한 일과 또 우리 조선이 당한 일본제국주의 강점의 식민치하 금서의 유형등일 것이다.
이제 우리역사의 금서사를 거슬러 살펴보면 어떤 것이 있었나 찾아보자. 한 자료에 의하면 고려시대 이전에는 그런 사실이 눈에 안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최초로 태종12년 (1412년) 『고려역대사적』과 『신비집』을 불태운 기록이 있다. 또 같은 태종17년(1417년)엔 참언(오늘의 예언서)일체를 불태웠다. 성종4년 (1498년)엔 김종직 김일손등의 토초 (사관이 기록한 역사의 원고)를 불태웠다. 연산군11년 (1505년)엔 관청문서 및 『여지승람』등의 개인소장을 금했다. 영조34년 (1758년)엔 천주교의 선교행위를 엄금하고 마침내 정조10년 (1786년)엔 연경으로부터 유서 이외의 사서의 구입을 금한다.
한편 정조12년엔 서학서를 불태우게 엄명했다. 정조15년엔 일체의 서학서의 사가의 소장과 소지휴대를 엄금했다. 또 한 사례는 철종5년(1854년)에 당시 경상도 관찰사직에 있던 주석우가 그의 고조부의 문집인 『서주집』을 출판했었는데 그중 제문 한편에 송시열을 비난한 대목을 삭제, 개작한 것이 말썽이 되어 나생들의 항의로 파직 유배되는 일이 생겼다. 앞에서 태종때 참서를 ,불태웠다는 사실에서 본다하더라도 조선시대 제1의 금서는 역시 『정감녹』과 허균작의 『홍길동부』이었을 것이다.
고종때는 『정감녹』을 이용한 모반음모가 두차례가 있었으니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한편 금서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누구의 사적비나 왕조보녹의 개작과 비석의 인위적 매장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한학음 김창현씨에 의하면 조선조에 그렇게 빈번한 사화가 있었지만 사필귀정으로 후대에 와서 언젠가 고쳐져 명예를 회복시키는등 충렬한 선비를 높이고 숭문의 사회적 기풍 탓으로 금서와 같은 옹졸한 사례를 별로 듣지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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