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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참상 세계에 알린 힌츠페터, 광주에 잠든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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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면

내가 죽게되면 5·18이 있었던 광주에 묻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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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에 최초로 알린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사진)가 올해 1월 79세로 숨지기 전에 자주 하던 말이다. 그는 2004년 심장마비로 쓰러진 직후 가족들에게 “광주에 묻어 달라”고 요청했다. 1년 뒤 건강을 회복해 광주를 찾은 그는 5·18기념재단 측에 자신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맡겼다. 비록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광주에 묻히지는 못하지만 유품만이라도 안장해달라는 뜻에서였다.

평소 “죽으면 광주에 묻어달라” 당부
고인 뜻 기려 망월동 기념정원 조성
생전에 맡긴 손톱·머리카락 묻기로
16일 개장식에 독일의 부인도 참석

광주에 대한 고인의 애틋한 감정은 198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ARD-NDR)의 일본특파원이던 그는 광주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목숨을 걸고 촬영한 영상들은 5·18의 실상을 가장 먼저 전 세계에 알린 귀중한 자료가 됐다.

그가 찍은 계엄군들의 진압 영상은 참혹했다. 영상에는 도청 앞에 즐비한 희생자들의 관, 탱크로 무장한 계엄군의 모습 등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희생자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가족, 계엄군에 맞선 시민들의 처절한 항쟁 장면도 들어있다. 영상을 촬영할 때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결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995년 은퇴 이후에도 5·18을 알리는 데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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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목숨을 걸고 현장을 촬영했다. 사진은 계엄군에 맞서 무장하고 순찰에 나선 시민군. [사진 5·18기념재단]

이런 고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정원이 광주광역시 망월동 묘역에 만들어진다. 망월동은 2002년 국립 5·18민주묘지로 승격돼 이전하기 전까지 5월 희생자들이 안장됐던 곳이다. 힌츠페터 정원에는 기념비와 게이트 조형물을 설치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당초 5·18기념재단은 고인의 유품들을 국립묘지인 5·18민주묘지에 안장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5·18 희생자가 아니란 지적이 일부에서 제기되자 망월동에 안장키로 했다. 대신 민주묘지에는 고인을 기리는 나무를 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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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목숨을 걸고 현장을 촬영했다. 사진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희생된 이들을 안치한 관. [사진 5·18기념재단]

고인의 얘기를 담은 영화 제작도 추진되고 있다. 80년 5월 당시 그를 서울에서 광주까지 태워준 택시기사를 소재로 한 영화 ‘택시 운전사(가제)’다. 고인은 생전에 “용감한 택시기사의 안내로 취재를 할 수 있었다”고 수차례 밝혔다. 그러나 택시 기사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6일로 예정된 정원 개장식에는 뜻깊은 손님이 참석한다. 고인의 부인 프람스티트 에렐트라우트(79)다. 부인은 이날 행사에서 고인의 머리카락과 손톱이 든 봉투를 망월동 옛 묘역에 묻을 예정이다.

앞서 5·18기념재단과 광주시는 지난 2월 고인의 장례식에 조문단을 보냈다. 당시 “올해 5·18기념식에 참석해달라”는 조문단의 초청을 부인이 받아들이면서 이날 행사가 성사됐다. 에렐트라우트는 최근 5·18기념재단에 보낸 편지에 “남편의 갑작스런 부고 이후 위로와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 드린다. 멀리 대한민국 광주에서 와주신 분에게 특별히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적었다.

광주광역시=최경호 기자 ckh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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