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제20대 국회는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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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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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사계절 어느 한순간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없지만, 늦봄과 초여름 사이 이맘때 세상은 온통 연초록으로 물든다. 풀과 꽃과 나무들이 저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밋밋했던 관악산이 한순간 눈부신 생명의 조화를 한껏 뽐내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이 계절은 슬픔과 미안함이 가득한 시간일 뿐이다. 생명이 피어나는 역동의 시절에 가없이 스러져간 아이들, 슬픔이 깊어지는 역설의 시절이 되었다.

청년들이 총선에 적극 참여한 건
소수가 독점한 불평등 사회에서
흙수저도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회로 바꿔달라는 간절한 주문
국민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동반성장의 가치에 비중 두어야

가천대 박형주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 304명을 구조할 시간과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탈출한 사람에 보태 국가는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국민의 안전은 국가가 책임질 거라는 믿음에 심대한 균열이 생겼다. 여기에 국가 운영의 책임과 권한이 있는 대통령, 여당 의원 및 공무원들의 태도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유가족을 돈만 바라는 악성 민원인처럼 대하고 진실 규명은 방기하거나 심지어 방해하고 있다. 슬픔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국가의 역할과 책임 그 어느 것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과연 지금 한국은 어떤 국가인가?

모든 국가가 다 그렇듯 한국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있다. 밝은 면으로는 경제성장을 꼽을 수 있다. 원조를 받던 최빈국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가 되었고,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나라 가운데 1인당 소득이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다음으로 높은 나라로 성장했다. 정치도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길 기다리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는 게 낫다’고 조롱받던 나라였지만 국민 스스로 헌법 문구로만 존재하던 민주공화국을 현실에서 구현했다. ‘한류’로 상징되는 문화예술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는 또 어떤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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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을 ‘복지’ ‘행복’ ‘안전’ ‘주권’ ‘인권’ ‘자유’와 같은 국민 개개인의 권리와 삶의 질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더 많다. 국가는 나름대로 부자지만 다수의 서민은 힘겨운 일상을 버티며 불안한 미래를 마주하고 있고, 청년세대는 꿈꾸는 것조차 사치가 돼버렸다. 불평등 정도는 세계 1위인 미국에 버금갈 정도로 심각하고 노인빈곤율, 자살률 등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그늘진 일상의 삶이 너무 깊고 넓다. 여기에 민주주의와 자유가 후퇴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부정적 평가까지 나온 지 오래다. 언론의 자유는 세계 70위로까지 추락했다.

더욱 심각한 건 청년세대가 한국 사회를 어둡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이 지금의 국가에서 희망을 찾지 못할 때 국가 발전은 정체되고 불안이 야기되어 붕괴 가능성이 커진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바로 그런 징후를 보인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성원 박사는 지난해 1월 ‘한국인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라는 토론회에서 20~34세 청년층의 42%가 ‘붕괴, 새로운 시작’을 원했고, 23%만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원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 2015년 11월호 ‘신동아’는 2030 청년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을 싫어한다는 조사 결과를 실었다. 지금의 한국이 그만큼 청년세대 다수가 자신의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붕괴하기를 바랄 정도로 어둡고 그늘진 나라라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제20대 총선에서 작은 희망을 본다. 청년세대가 이번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젊은이들이 아직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여소야대를 만들어낸 민의에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싶은 청년세대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소수가 과실을 독점하는 불평등 사회를 흙수저도 성실히 일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회로 바꿔달라는 주문이다. 20대 국회의 책임과 의무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새로운 국회가 민의를 대변할 의지가 있다면 지금의 사회구조를 바꿀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책은 거시경제 수치에 연연하기보다는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모두 함께’라는 동반성장의 가치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예부터 밥이 하늘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밥이 다가 아닌 시대다. 그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전체 총량을 크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각의 개체가 존재할 수 있는 질과 지속가능성이 더 중요해졌다. 오늘날은 저성장 뉴노멀(new-normal) 시대라고들 한다. 이 시대에는 ‘함께 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중단 없는 지속성장을 가져오고 사회 구성원의 안전과 안정된 삶을 제공하는 지름길이다. 덧붙여 세월호 참사는 경제활성화와 규제개혁이란 명목으로 선박사용 연한을 늘려준 의원들의 정책 마인드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