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매거진M] 밟으면 욱하는 우리 시대 을(乙)의 연대 '욱씨남정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꼴갑(甲) 저격 사이다 드라마’를 표방한 ‘욱씨남정기’(방영 중, JTBC). 갑의 횡포에 맞서는 을(乙)의 반격을 속 시원하게 그린 작품이다. 오랜만에 TV 드라마로 컴백한 이요원과 윤상현이 각각 ‘욱씨’와 ‘남정기’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욱씨남정기’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미생’(2014, tvN)과 한 나무에서 나온 다른 가지 같은 드라마다.

일단 ‘미생’부터 되돌아보자. 케이블 드라마의 대중적 파급력을 한 뼘 넓힌 이 작품은 직장인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해 호평받았다. 특히 직장이 주인공의 연애를 위해 존재하는 무대가 아님을 보여 줬다. 지금까지 대다수 TV 드라마들은 등장인물의 직업을 단순히 연애 관계를 돕는 장치로 활용해 왔다. 예컨대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 ‘법정에서 연애하는 드라마’ 같은 식으로만 그리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미생’은 유별난 러브 라인 없이 치열하게 일하는 모습만으로 충분히 시청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반면 ‘욱씨남정기’는 이러한 현실 감각을 유지하면서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변용해 극적 재미까지 끌어올렸다. 여기에서도 사랑보다는 일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여러 캐릭터가 합창하듯 고르게 녹아들어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 ‘미생’과 달리, ‘욱씨남정기’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대립과 조화가 도드라진다. 욱다정(이요원)과 남정기(윤상현)는 어쩐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캐릭터 조합인데,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몹시 잘 어우러진다.

갑을 사이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후 함께 을의 처지가 되었다가 요즘은 서서히 동지로 거듭나는 중이다. 대기업 ‘황금화학’ 최연소 팀장에서 중소기업 ‘러블리 코스메틱’ 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욱다정. 사실 본명은 ‘옥다정’이지만, 어디서나 욱하는 성질 때문에 모두가 ‘욱다정’이라 부른다. 남정기는 황금화학의 하청 업체 러블리 코스메틱 과장이며 소심한 성격을 지녔다. 필연처럼 만난 둘은 반복된 우연에 악연인 줄 알았다가 마침내 인연으로 얽힌다. 욱다정은 강력한 매력을 지닌 갑이다. 뚜렷한 직업관에 열정과 실력까지 두루 갖췄다. 한편 남정기는 마음이 따뜻해 더 안쓰러운 을이다. 그는 밥벌이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기꺼이 비굴해질 준비가 되어 있다.

기사 이미지

이들은 한국적으로 변형된 스크루볼 코미디(Screwball Comedy·1930~5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장르이며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의 캐릭터다. 이 장르에서 남녀 주인공은 대개 우여곡절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대사에 희극적 요소와 위트가 살아 있는 것도 특징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욱씨남정기’ 초반에는 둘 사이에 사랑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듯 이 드라마는 남녀의 연애라기보다 을의 연대에 가까운 전개를 보여 준다.

‘독하다고 오해받는’ 여자가 ‘실속 없이 성격만 좋은’ 남자를 변화시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 변화를 묘사하는 방식이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이 시대의 을이자 우리 곁의 미생인 남정기. 이제껏 그가 겪었던 머피의 법칙이 단지 지독한 불운 때문만은 아님을, 욱다정의 시원한 화법과 거침없는 행동을 통해 전달한다. 남정기에게 욱다정은 로맨틱 코미디의 상대역이라기보다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에 가깝다. 때로는 더 나아가 성장 드라마에 나올 법한 멘토 같기도 하다.

사실 지금 이 땅에서는 남녀의 연애보다 을의 연대가 오히려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욱씨남정기’는 이러한 을의 연대가 빚어낸 성취와 변화를 통해 시청자에게 익숙하고도 낯선 쾌감을 선사한다. 부디 이토록 준수한 용의 머리가 그저 로맨틱한 뱀의 꼬리로 전락하지 않기를 응원한다.

진명현 노트북으로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등 장르 불문하고 동영상을 다운로드해 보는 남자. 영화사 '무브먼트' 대표. 애잔함이라는 정서에 취하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