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우지경의 Shall We Drink] ⑫ 체코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을 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필스너 우르켈이 태어난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 전경.

맥주 거품을 좋아한다. 이상하게도 구름처럼 보드라운 거품이 입술에 닿는 순간,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톡 쏘는 탄산이 주는 시원함도 좋아한다. 야외에서 맥주를 마시기 좋은 계절이 오면, 탐스러운 거품과 청량한 탄산이 살아 있는 필스너(Pilsner) 맥주를 찾게 된다.

라거(Lager)의 대표적인 스타일, 필스너 맥주는 1842년 10월5일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플젠(Plze?)에서 시작됐다.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Plze?ský Prazdroj) 양조장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맥주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을 만드는 양조장이다. 독일어로 필스너는 플젠, 우르켈은 원조를 뜻한다. 체코어로는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다. 그러니까 필스너 우르켈과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는 같은 말이다.

기사 이미지

맥주의 도시, 플젠 구시가지. 역사의 숨결이 깃든 도시다.

필스너 우르켈 이전부터 플젠은 맥주의 도시였다. 1295년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왕이 플젠 정착민에게 맥주 제조와 판매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당시 플젠 시민들이 가가호호 빚은 맥주는 에일(Ale)이었다.

우흘라바(Úhlava), 우슬라바(Úslava), 라드부자(Radbuza), 므제(Mze) 등 플젠을 감싸 안고 흐르는 여러 강을 따라 소규모 양조장이 늘어났다. 한데 맥주의 품질이 점차 하향평준화 돼갔다. 상온에서 발효를 시키다 보니, 산패가 심해졌다. 급기야 1838년 2월에는 플젠 시청사 앞에서 맥주 36배럴이 음용 불가 판정을 받아 버려졌다. 일명 ‘36배럴 사건’으로, 플젠 맥주사의 전환점이 됐다.

기사 이미지

36배럴 맥주 사건의 산 증인 플젠 시청사.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고 의기투합한 플젠 시민들이 세운 ‘시민 양조장’이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다. 독일의 맥주 장인 ‘요셉 그롤’까지 초빙해, 맥주 맛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요셉 그롤이 고안한 ‘하면 발효법’과 보헤미안 보리(몰트의 원료), 사츠 홉(Saaz hop), 플젠의 부드러운 연수(軟水)가 만나 순백의 거품이 이는 황금빛 필스너가 태어났다.

지난해 여름,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양조장 정문 앞에 섰을 때 심장이 울렁거릴 만큼 흥분됐다. 내 냉장고 속, 필스너 우르켈 캔에 그려진 로고, 비어 케이트였다. 저 문을 통과하면, 플젠에서 필스너 우르켈을 마셔보리라는 로망이 이뤄질 터였다. 

기사 이미지

45년 경력의 브루어가 하얀 거품이 탐스럽게 올라간 맥주를 따르고 있다.

“전 세계 맥주의 70%를 차지하는 필스너 맥주는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지난해 관람객 수만 27만5000명이었습니다. 다들 아주 특별한 필스너 우르켈을 맛보기 위해 이곳을 다녀갔지요.”

다니엘 슈페일 매니저의 인사로 양조장 투어가 시작됐다. 워낙 규모가 커서 버스를 타고 곳곳을 돌며 제조 공정을 살펴봤다. 시설은 현대화됐지만 재료는 예전과 동일하며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몰트와 물을 가열한 뒤 섞는 ‘3중 디콕션(Triple decoction)’이 필스너 우르켈의 비결이라고 했다. 알코올 도수가 낮은데도 맥주 맛이 밍밍하지 않고 속이 꽉 찬 이유였다.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 지하저장고에 놓인 오크통. [사진 체코관광청]

기사 이미지

아주 특별한 시음을 위해 지하저장고로 향했다. 8m 깊이의 서늘한 지하 저장고의 깊은 곳에 놓인 오크통에는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맥주가 효모와 함께 익어가고 있었다. 양조장을 찾는 방문객들을 위해 옛 방식 그대로 오크통에서 발효·숙성시킨 필스너 우르켈이었다.

45년이 넘게 이곳에서 일해 온 브루어의 손이 기울이는 섬세한 각도에 따라 황금빛 액체가 튤립 모양 잔에 담겼다. 갓 내린 첫눈처럼 순수한 거품과 호박색을 눈으로 음미한 후 경건하게 한 모금 꿀꺽! 오호라, 효모가 살아있는 필스너 우르켈은 과연 다르구나 싶었다. 홉과 몰트가 조화를 이룬 맛이 쌉싸래하면서도 구수하고 청량했다. 점점 잔이 비어가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기사 이미지

플젠의 펍, 나 파르카누에서 맛 본 필스너 우르켈.

그날 이후 나는 맥주 거품만큼이나 맥주 양조장을 좋아하게 됐다. 특히 오래된 양조장에서 마시는 맥주의 맛을 좋아하게 됐다. ‘맥주는 양조장 굴뚝 그림자 아래서 마셔야 제맛’이라는 속담도 철석같이 믿게 됐다. 기회가 있는 한, 아니 없다면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양조장 굴뚝 그림자 아래서 전통이 빚어낸 신선한 맥주를 마셔볼 작정이다.

기사 이미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