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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가스법 개정 늦어져 과징금 6000억 낼 위기…“생산, 중국 돌릴 것 검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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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경남 밀양의 A자동차 부품업체는 제품의 95%를 현대·기아차에 납품한다. 지난해 200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영업이익률도 10% 정도로 제조업체로선 꽤 높다. 하지만 이 회사의 관리담당 이사인 장모(53)씨는 “회사의 미래가 어둡다”고 말했다. 심각한 ‘인력난’ 때문이다. 공장 근로자 70명 중 57명이 40~50대다. 20대는 5명에 불과하다.

‘입법 태업’에 골병 든 기업들
뿌리산업 파견법 처리도 지연
지방 중기 “인력 못 구해 속 터져”

“여야, 경제 살리기 협조하고
기업은 투자·고용 책임 다해야”

장 이사는 “지난해 인터넷과 생활정보지 등에 구인 광고를 냈지만 입사지원서를 한 통도 못 받았다. ‘3D’ 업종이란 인식 때문에 젊은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이런 인력난 때문에 장 이사는 지난해 9월 새누리당이 주조·금형·용접 등 뿌리 산업에도 파견 근로를 허용하는 내용의 파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는 소식에 무릎을 쳤다. 개정안은 55세 이상 근로자에 대해 뿌리 산업에도 파견을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파견법을 포함한 노동개혁 4대 법안이 여야 정쟁으로 국회에 표류하면서 기대를 접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파견 근로 범위를 넓히면 근로자의 노동 환경이 열악해질 가능성이 높다”며 반대하고 있다.

경기도 시흥의 B반도체 업체 총무이사 김모(52)씨는 온실가스 배출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내년까지 정부가 할당한 온실가스 배출량을 맞출 수 없어 과징금 6000억원을 내야 할 상황이다. 김씨는 “배출권 비용 부담은 그대로 제품 가격에 반영된다. 미국·중국 같은 해외 경쟁국은 온실가스 배출권 규제가 한국만큼 세지 않아 가격 경쟁력에서 우리를 압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권 규제는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수준이다. 생산 과정에서 직접 배출하는 온실가스뿐 아니라 외부에서 공급한 전기·열을 쓸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간접 배출)까지 규제하기 때문이다. 간접 배출을 규제에서 빼는 내용의 온실가스 배출권 할당법 개정안이 2014년 8월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김씨는 “배출량 규제를 피하기 위해 중국으로 생산 물량을 돌리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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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가 다투느라 입법에 손 놓은 ‘식물 국회’ 때문에 기업이 속 터지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17일까지 19대 국회 법안 처리율은 43.3%다. 18대(53.5%)나 17대(56.8%)에 비해 10%포인트 넘게 떨어질 정도로 부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측은 “여당이 다수였던 19대 국회에서도 경제활성화 법안을 통과시키기 어려웠는데 20대 총선에서 ‘경제 민주화’를 내건 야당이 우세했다”며 “정부·여당이 추진해 온 경제활성화 법안이 ‘올 스톱’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입법이 지지부진하다 보니 우리 산업은 빠르게 변하는 흐름에도 뒤처지고 있다. 선진국에선 이미 자리 잡은 인터넷 전문은행이 대표적이다. KT·카카오 같은 정보기술(IT) 기업이 은행 지분을 4% 이상 가질 수 없도록 한 은행법은 인터넷 전문은행 출범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힌다. 새누리당이 관련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하는 은행법 개정안을 지난해 7월 발의했지만 20대 국회에서 처리될지도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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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서강대 최운열(경영학) 석좌교수는 “KT·카카오 같은 회사에 기존 재벌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선 경쟁력 있는 인터넷 전문은행이 나오기 어렵다”며 “은행법 개정에 반대하는 당내 의원을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이 강점을 갖고 있는 의료·IT 기술을 융합한 원격진료도 마찬가지다. 원격진료를 허용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은 2년 넘게 국회에 발이 묶여 있다. 미국·일본은 1997년, 중국은 지난해 원격진료를 허용했다. 전 세계 1000만 명 이상의 회원을 둔 미국 원격의료 업체 텔레독은 2014년 30만 건을 진료해 5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경제 활성화를 위한 입법 활동보다 ‘기업 옥죄기’에 나설 것이란 우려까지 나온다. 당장 더민주는 법인세와 최저임금의 인상, 국민의당은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와 초과이익 공유제 같은 공약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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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승 한국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은 “정당 전략에 따라 무조건 반대만 하다간 국민으로부터 외면받을 수 있다. 여야가 경제 살리기를 위해 협조할 건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 스스로 국회만 바라보지 말고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양대 김태윤(행정학) 교수(규제개혁위원회 간사)는 “대기업은 왜 ‘경제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며 “투자와 고용이란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다해 국민·정치권으로부터 존경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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