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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일본 지진 보는 달라진 한국 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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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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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5년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1만8000여 명이 희생되자 한국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과거는 과거고 인간적으로 일본을 돕자”는 글이 인터넷을 뒤덮더니 삽시간에 적십자에만 성금 456억원이 모였다. 그 5배 가까운 8만7000여 명이 희생된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걷힌 돈은 46억원. 동일본 대지진 때 10배가량 모인 셈이다. 한국인의 중국 선호도가 일본보다 약간 높던 때였다.

왜 이런 걸까. 이는 한·일 간 애증 관계 탓이라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친밀감을 주는 상대가 섭섭하게 굴면 생기는 감정이 애증이다. 이럴 경우 상대가 잘되면 밉지만 너무 잘못되면 애정이 튀어나온다. 옛 애인이 성공하면 배 아프지만 불행해지면 동정심이 샘솟는 이치다. 어딜 가도 일본 요리, 만화가 넘치는 한국이다. 대일 거부감이 강해도 무의식 속에는 “좋은 점도 많은 친숙한 나라”란 인식도 공존한다. 대지진 때는 이런 애증의 메커니즘이 작동한 거다.

그랬던 민심이 이번 구마모토 강진 때는 싹 변했다. 애증 속에서 사랑이 증발했다. 이번에는 “모금이고 나발이고 10원짜리도 주면 안 된다”는 모진 글만 넘친다. 정 많은 우리 백성이 왜 이리 됐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지난 대지진 때 애써 마련한 구호품이 한때 수령 거부됐었다는 소식에 화가 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근본적 책임은 양국 정치권에 있다. 대지진 당시 일본 민주당 정권은 이웃과의 화해에 애썼다. 이 덕에 2011년 일본에 대한 “호감을 느낀다”(41%)와 “느끼지 않는다”(44%)고 답한 한국인 비율은 비슷했다. 반면 아베 정권의 과거사 수정이 본격화된 지난해에는 비호감(74%)이 호감(17%)의 4.4배였다. 박근혜 정부도 한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는 대일 외교도 없다”는 입장을 고집해 양국 관계를 경색시켰다.

더 큰 악재는 “한국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헛소문이 일본 SNS에 번졌다는 뉴스였다. 15만여 명이 희생된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똑같은 소문이 퍼져 한국인 6000여 명이 학살됐던 참담한 기억이 민심을 자극했다.

사연 모르는 일본인이라면 한국인의 분노를 이해 못할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에 따르면 일본 교과서는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피해를 희석시키는 쪽으로 개편 중이라 한다. 이런 추세라면 서로 간의 무지와 오해는 확대될 수밖에 없다. 한·일 공동 역사교과서 보급의 시급함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