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DJ 사면' 전두환 압박…방미계획 발표 연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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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유엔 사무총장(左), 김대중 전 대통령(右). [중앙포토]

198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귀국 문제로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 계획 발표가 연기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외교부는 17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외교문서 25만여 쪽을 공개했다. 정부는 생산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심의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주한 미 대사 전두환 접견 뒤 美 “대단히 실망스러워”
반기문 사무총장, 85년 美 연수중에도 DJ 동향 보고

형집행정지 상태에서 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망명했던 DJ는 2월 총선 전에 귀국하겠단 뜻을 밝혔다. 85년 1월5일 류병현 주미 대사는 폴 월포위츠 미 국무성 동아태차관보와의 면담결과를 본부에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월포위츠 차관보는 “김이 귀국 후 재수감되면 미 정부는 의회로부터의 거센 압력과 성화를 면치 못할 것이며 문제의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케네디 의원 등은 레이건 행정부에 대한 공격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본 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월포위츠 차관보가 먼저 꺼내 30여분 간의 대화로 이어졌으며, 월포위츠 차관보는 “김이 재수감될 경우 나나 워싱턴에서 류 대사의 생활이 모두 비참해질(miserable) 것”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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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관련 동향 보고를 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류 대사는 1월7일 본부에 보낸 보고에서 “하버드대에서 연수중이던 반기문 참사관이 130여명의 미 학계 및 법조계 인사들이 연서한 김대중의 안전 귀국 요청 서한을 대통령 앞으로 보낼 것이라는 정보를 교수로부터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원경 외무부 장관은 류 대사에게 “미 국무성이 김대중 접촉시 귀국이 오히려 국내 정치 발전이나 민주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줄 것을 요망한다. 월포위츠 차관보에게 본건 협의가 태평양계획 발표 이전에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단 점을 미 측이 유념하도록 당부하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태평양계획’은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뜻한다.

리처드 워커 주한 미 대사는 1월19일 이 장관을 직접 만나 “김이 선거(2·12 총선) 이후 귀국해달라는 우리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한국 정부가 사면해주면 좋겠다. 사면을 해주는 경우에도 김의 정치 활동 규제는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나길 요청하며 “이 건은 국내 문제에 그치지 않고 한미관계 전반과 태평양계획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문제로, 백악관에서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DJ의 귀국 연기 및 사면과 전 대통령의 방미를 연결시켜 한국 정부를 압박한 셈이다.

외무부는 1월21일 내부회의를 통해 “김대중의 선거 후 귀국이 가장 바람직하며 이를 위해선 김에 대한 사면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런 결정의 대미 통보는 각하가 워커 대사를 만나 직접 하거나 안기부장이 워커 대사 앞 서한으로 알리는 방안이 고려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22일 워커 대사는 전 대통령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1월23일 클리브란드 주한 미 공사는 외무부 미주국장을 만나 “어제 워커 대사가 대통령 각하를 뵈온 내용을 워싱턴에 자세히 긴급보고했다. 어젯밤 들어온 국무성의 1차 반응을 한마디로 대단히 실망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국무성 한국과장과 차관보급에서는 이와 관련, 24일로 예정된 태평양계획의 발표를 연기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22일 워커 대사와 전 대통령의 대화 기록은 나와있지 않지만, 두 문서를 종합해보면 이 자리에서 한국 정부가 DJ를 사면하지 않겠다거나 선거 전 귀국시 재수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 클리브란드 공사는 “그 간 협의해온 안기부장의 이야기와 대통령 말씀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백악관과 국무성은 대사관보다 더 강한 느낌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외무부는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전 대통령의 방미와 DJ 귀국 건을 연결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으나 워싱턴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23일 “현 상황에서 미국이 발표 연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동의하겠다”는 입장을 전한다.

이튿날인 24일엔 한 발 더 물러서 이 장관이 워커 대사에게 “김 문제와 관련해 미 정부에 부담주는 것을 원치 않는다. 김이 스스로의 의사로 귀국한다면 시점이 언제든 받아들일 것이다. 김의 귀국과 관련해 레이건 행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워커 대사는 “레이건 행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재수감을 하지 않고 가택연금을 하겠단 뜻으로 해석된다”며 환영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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