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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길을 가다(8)|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 찾아본 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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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가미노세끼(상관)를 떠난 신유한공공 일행의 선단은 동쪽으로 바닷길을 재촉, 가마가리(포예)에서 한차레 문화교류의 꽃을 피운뒤 도모노우라(?포)로 향한다.
도중의 뱃길은 『거울같이 맑은 물에 집과 소나무가 비치고』 『구름과 숲과 섬들이 이리저리 어우러져 마치 수를 놓은 것같은』(해유녹) 아름다운 경치의 연속이다.
통신사의 배가 지나는 세도나이까이(뇌호내해)는 예로부터 풍광명미한 자연의 경관으로 이름난 곳이다. 호수처럼 잔잔한 물위에 크고 작은 3천여개의 섬이 사시사철 짙푸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기온이 따뜻해 겨울에도 섭씨 4∼5도를 내려가지 않는다.
이때문에 시인묵객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일본의 고전으로 꼽히는 시가집 만요슈(만섭집)에도 이곳을 노래한 것이 많다.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도모노우라는 풍광이 수려한 세도나이까이에서도 절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여기에 머물렀던 통신사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1655년 이곳을 찾은 통신사의 종사관 남룡익은 『상쾌함이 다른 곳에 비할수 없다. 창해를 굽어보니 멀고 가까운 섬들이 구름사이에 명멸한다』고 읊었다.
56년뒤인 1711년 통신사때의 종사관 이방언은 「일동제일형승」이라는 편액을 숙사였던 복선사 대호루에 남기고 있다.

<큰 등달아 밤길 밝게 구경꾼 동서를 메워>
일동제일형승이란 찬사는 도모노우라를 소개하는 관광안내서에 빠짐없이 실려 좋은 선전자료가 되는 동시에 그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다시 8년뒤에 이곳에 온 신공은 도모노우라의 승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해안 산은 높이 빼어나고 바다에 임했는데 삼면의 여러 산과 더불어 서로 껴안은듯 해서 만을 이루었다. 묏부리가 바다에 잠긴 곳에는 돌을 깎아 둑을 쌓았는데 반듯하기가 마치 칼로 깎아 놓은듯 하다. 소나무·삼나무·귤·유자와 백가지 과수의 숲을 끼고 있어 짙푸른 것이 사방을 둘러싸고 그것들이 모두 물속에 거꾸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여기에 이르면 제일가는 경치라고 자랑한다. 그 동쪽에는 가파른 언덕이 바다에 잠겼는데 언덕을 끊어 길을 내고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었다. 그위에 날아갈듯한 건물이 서 있는데 흰벽이 구름위에 빛난다. 이름을 원법사라하며 배위에서 바라보니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곳 같다.』
후꾸야마(복산)역에서 도모노우라로 가는 13㎞의 길은 산을 넘는 우회로를 택했다. 높은 곳에서 항구를 조감하자는 이진희교수의 제의를 따른 것이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본 도모노우라는 규모는 작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임을 한눈에 알수 있는 아름다운 항구였다.
통신사가 묵고간 복선사·대호루, 그리고 사적으로 지정된 안국사·대가도성적 등 역사의 현장이 그대로 남아있고 포구 앞에는 호수처럼 잔잔한 물위에 선취도·변천도가 그림같이 떠있다.
이교수가 일일이 손을 들어 절과 섬들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
도모노우라는 무로마찌(실정)막부 최후의 장군 「아시까가·요시아끼」(족리의소)가 「오다·노부나가」(직전신장)에게 쫓겨 피난정권을 수립했던 곳이다. 그런 사연때문인지 절이 많다. 한때는 사찰의 수가 30여개나 됐단다. 지금은 많이 줄었다지만 23개를 헤아린다.
거리는 좁은 길과 낡은 지붕들이 줄줄이 잇대어 고색이 창연하다. 바깥 세상의 눈부신 변화와는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15년전에 들어섰다는 8층높이의 시사이드호텔이 유난히 높게보여 위화감을 줄 정도다.
신공이 이곳에 왔을 때는 도모노우라도 다른 항구와 마찬가지로 번화한 곳이었다.
그때의 모습을 해유녹에서 찾아보자.
『사관은 복선사다. 절은 해안 산아래에 있다. 건물은 넓고 크며 가구들도 풍성하고 사치스럽다. 만구에서 사관까지는 가히 6, 7리는 됨직한데 노상에는 겹돗자리를 몽땅 깔아 한점의 티끌도 없다. 다섯 걸음마다 장대 하나씩을 세우고 거기에 큰 등을 달아놓아서 밤에도 낮처럼 보인다. 기와지붕과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빈틈도 없다. 비단옷을 입은 구경꾼들이 동서를 메웠다. 그 가운데 장사꾼·기녀들이 많고 부자들의 찻집과 각주의 사관들이 왕래하는 집들이 있다. 번화한 것이 눈에 넘치니 이곳도 또한 적관(시모노세끼)이동의 한도회다.』
지금의 도모노우라 인구는 8천여명. 어업과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장사가 주업이나 대장간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옛날에는 칼을 많이 만들었으나 지금은 배에 쓰는 도구를 만들고 있다.
복선사는 선취도를 왕래하는 연락선을 타고 내리는 선착장과 길하나를 사이에 둔 바닷가였다.
높은 축대위의 낡은 건물이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층계를 돌아 경내에 들어서니 깨끗이 쓴 넓지 않은 마당에 석등만이 서있다.
추녀에 높게 걸린 검게 바랜 대호루란 현판이 뭉클한 감회를 자아낸다.
대호루는 복선사에 잇대어 지은 건물로 역대 통신사의 정사·부사·종사관 등 3사가 묵는 영빈관이었다. 다다미 78장을 깔아야하는 넒이로 16세기후반에 세워졌다.
지금은 절을 찾는 손님의 응접실을 겸해 통신사들이 남긴 글이나 대호루에서 내다보는 경치를 밑천으로 주지스님의 부수입을 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바다로 면한 넓은 방에는 이방언의 글씨로 된 「일동제일형승」의 편액을 비롯, 정사 홍계희, 제술관 박경행 등의 글이 나란히 걸려있다.
미닫이 창문을 여니 푸른 바다가 눈밑에서 찰랑이고 물에 뜬 선취도 변천도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뀐숙사 투숙 거부 백점흉으로 소동벌여>
신공일행은 처음에 도모노우라를 그냥 지나치려 했다. 가마가리에서 새벽에 떠난 배가 순풍을 만나 하오 2∼3시경에 도모노우라에 도착했기 때문에 다음 기항지인 우시마도(우창)까지 직행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통신사의 호위책임을 맡은 대마번주의 배가 뒤에 처져 늦게 도착한데다 번주가 직접 일행의 상륙을 간곡히 요청해 하룻밤을 묵게 된다.
1748년 통신사때는 시고꾸(사국) 요슈(예주)의 우와지마(자화도) 번이 맡는다. 이때의 정사는 .홍계희였다.
그런데 홍계희일행이 도모노우라에 왔을 때는 숙사가 대호루가 아닌 아미타사로 바뀌어 있었다.
복선사에서 보는 절경은 앞서 다녀간 통신사들의 글을 통해 당시의 국내 문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통신사 일행은 숙사가 바뀐 이유를 일본측에 따져 물었다.
일본측의 접대책임자는 『복선사에 불이나 모두 타서 없어져 버렸다』고 엉뚱한 거짓말을 했다.
통신사 일행중엔 전에 따라왔던 사람들도 있어 거짓말이 당장 탄로가 났다.
격분한 통신사 일행은 투숙을 거부하고 배로 돌아가버려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 소동은 대마번주의 노력으로 일단 수습이 된다.
홍계희일행은 에도(강호)로부터 귀국하는 길에는 바라던 대로 대호루에 올라 시를 읊고 경치를 즐긴다. 대호루란 이름도 이때 이들이 지어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 복선사에 걸려 있는 대호루 현판은 당시 20세의 청년으로 아버지를 따라 통신사일행에 참가했던 홍계희의 아들 홍경해가 쓴 것이다.
글 신성순 특파원
사진 장남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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