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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의 아하, 아메리카] ‘패’ 감추고 막말로 ‘판돈’ 키워 … 트럼프, 선거도박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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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 공화당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는 스스로를 도박사로 칭한다. 1990년 2월 트럼프는 일본인 카시와기 아키오(柏木昭男)에게 승부를 겨루자며 자신이 소유한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트럼프 타지마할’ 카지노 호텔로 초청했다. 카시와기는 전세계 카지노를 돌며 바카라로 수백만 달러를 딴 도박사다. 트럼프는 카시와기와의 승부를 전세계 언론이 보도하면 트럼프 카지노가 세계 최고로 부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위험하다”며 만류한 측근들의 우려대로 트럼프 카지노는 카시와기와의 바카라 대결에서 이틀 만에 600만 달러(69억원)를 잃었다.

일본 큰손에게 600만 달러 잃자
1000만 달러 따 복수한 ‘도박사’

‘밑천 달리면 진다’ 재산 3배 과장
비판 받으면 더 세게 꼭 받아쳐

트럼프는 3개월 후 카시와기를 다시 초청했다. 이번엔 미 국방부에 자문하는 랜드연구소의 수학 전문가를 동원해 바카라의 승리 확률까지 자문 받았다. 트럼프의 도박은 적중했다. 카시와기와의 리턴 매치에서 트럼프 카지노는 1차전의 손해를 메우고도 남는 1000만 달러(115억원)를 땄다. 2년 후 빚에 쪼들리던 카시와기는 일본에서 150차례 칼에 찔려 죽은 채로 발견됐다. 트럼프 카지노는 문을 연지 1년 만인 91년 파산했다.

트럼프는 97년 저서 『복귀의 기술(The Art for the Comeback)』에서 당시 승부를 놓고 “나는 도박사였다. 이건 (그때까지)내 스스로도 전혀 몰랐다”고 썼다. 폴리티코는 지금도 카지노 업계에서 전설처럼 남아 세기의 대결을 전하며 “트럼프는 한때 카지노를 운영했던 소유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무모한 도박사였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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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지난해 6월 출마 후 도박 같은 선거전으로 대선을 뒤흔들고 있다. 지난달 21일 워싱턴포스트(WP)를 찾은 트럼프는 미국의 남중국해 대책을 놓고 “미국은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예측 가능하다”고 답했다. WP가 다음날 사설로 이를 비판했을 정도로 황당 답변이었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의 지론이다. 트럼프는 이슬람국가(IS) 격퇴 방안을 놓고도 블룸버그통신에 “우리는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고 답했다. 대책을 공개하면 상대가 준비한다는 논리는 패를 읽히면 진다는 도박의 상식을 연상케 한다.

밑천이 달리면 도박에선 진다. 트럼프는 지난해 6월 21일 출마 선언 당일 “내 재산은 100억 달러가 넘는다”고 과시했다. 이후 내부를 금 도금한 전용 보잉 여객기를 타고 다니는 그의 유세는 충성층에게 워싱턴 정치인들과 차별화한 ‘성공한 기업인’ 트럼프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봤다. 그러나 블룸버그통신이 지난해 트럼프의 재산신고서를 분석한 결과 실제 재산 평가액은 29억 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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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극단적 막말이나 비상식적 공약으로 판돈을 계속 올리는 트럼프의 베팅이 도박이나 다름없다. “멕시코 불법 이민자는 성폭행범”, “무슬림 입국을 전면 금지하겠다”, “물고문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책·노선·매력 대결을 지향했던 미국 선거를 뒤바꿔 언론과 여론이 트럼프에 몰려다니도록 했다.

또 트럼프는 지고는 못산다. 경쟁자들이 비판하면 반드시 받아 친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지지 단체가 자신의 아내 멜라니아의 누드 사진을 공개하자 곧바로 크루즈 아내의 외모를 비하하는 사진을 올린 게 대표적이다. 멜라니아는 지난 4일 지원 연설 도중 “남편은 공격 당하면 10배 더 세게 되받아 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도박 스타일은 결국 위기를 맞고 있다. 트럼프의 낙태 여성 처벌 발언은 여성 표에 악영향을 줬고, 한·일 핵 무장 주장은 군 통수권자 트럼프에 대한 불안감을 자초했다. AP통신과 여론조사기관 GfK가 8일 공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응답자의 69%가 트럼프에 대해 ‘비호감’이라고 답했다. 2월 조사 때보다 10% 포인트 오른 수치다. 트럼프로선 막말을 계속하면 반트럼프 정서가 강화되지만 그렇다고 막말을 자제하면 트럼프 충성층이 떨어져 나가는 진퇴양난에 서 있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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