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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한국을 거대한 ‘상상력의 전시관’으로 만들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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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우덕 기자 중앙일보 차이나랩 고문/상임기자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할까. 넓은 땅, 풍부한 자원, 축적된 자본, 넉넉한 인구…. 경제학에는 그렇게 나온다. 그러나 200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에드먼드 펠프스(Edmund Phelps·83)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이 시대 경제 발전을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는 혁신”이라고 단언한다.

이하경 논설주간 묻고 에드먼드 펠프스 컬럼비아대 교수 답하다

그가 말하는 ‘혁신’은 특정 개인이나 특정 회사의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다.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사회 전반의 자생적인 혁신(grassroot innovation)’이다. ‘광범위한 혁신이야말로 생산력의 원천’이라는 지적이다. 펠프스 교수는 국내에도 소개된 저서 『대번영의 조건』(원제 Mass Flourishing)에서 “혁신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사회 역동성”이라며 “서구의 위기는 지도자들이 역동성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본지 이하경 논설주간이 지난달 24일 중국 하이난(海南)성 보아오(博鰲)에서 열린 ‘보아오 포럼’에 참가한 펠프스 교수를 만났다. 주제는 역시 혁신이었다. 그는 한 시간여 진행된 인터뷰에서 “혁신이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 나갈 때라야만 매력적인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혁신을 생산요소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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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중국 하이난성 보아오에서 열린 보아오 포럼에 참가한 펠프스 교수(왼쪽)와 이하경 주간이 인터뷰를 마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인터뷰는 한국 정부 대표로 참가한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주선했다.

교수의 저서 『대번영의 조건』은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을 통해 한국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한국을 혁신을 위한 거대한 ‘상상력의 전시관(imaginarium)’으로 만들라고 권하고 싶다. 평범한 사람들도 혁신에 동참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개개인이 새로운 제품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를 꿈꾸고 새로운 생산 방법을 고안해 낼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혁신은 민간이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한국은 미래창조과학부를 설립하는 등 정부가 직접 나서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혁신이 갖는 장점과 단점을 지적해 달라.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정부가 부처를 만들어 혁신을 이끈다니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누군가 혁신을 주도해 간다면 그건 없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정부가 민간의 혁신 자원을 끌어다 쓴다면 재고해봐야 한다. 민간의 혁신은 수백만 명의 사람이 새로운 제품을 만들려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반면 정부의 혁신은 소수의 제한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당연히 민간의 혁신 역량이 정부보다 뛰어나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간이 마음껏 혁신 역량을 발휘하도록 역동성을 유지해 주는 것, 그게 정부가 할 일이다.”
한국의 혁신 역량을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의 상황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혁신이 몇몇 소수의 기업에 집중돼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삼성 같은 회사 말이다. 혁신이 경제 전반에 퍼져 있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혁신이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장려한다면 경제는 분명 성장할 것이다. 그건 한국 경제에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비중이 세계 1위다. 그러나 효율은 매우 낮다. R&D 효율을 끌어올리는 게 당면한 과제다. 어떻게 하면 높일 수 있을까.
“R&D투자는 새롭지 않은 분야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연구를 위한 연구로 그치는 경우도 많다. R&D 효율이 낮다고 해서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원래 그런 거니까 말이다.”
보아오 포럼에도 자주 오고 중국을 자주 여행한 것으로 안다. 중국은 지금 ‘대중창업 만인혁신’(大衆創業 萬衆創新)을 기치로 혁신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중국의 혁신 능력은 2010년 세계 4위였지만 영국·캐나다 등을 차례로 제치고 현재 미국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중국은 지금 세계에서 유일하게 더 혁신할 수 있는 나라다. 파이어니어(개척) 혁신가가 지금 수백 명, 수천 명에 이르고 있을 뿐 아니라 10년 후에는 10배로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가 정신도 투철하다. 뭔가 잘못돼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제외한다면 중국의 혁신은 더 광범위하게 경제 전반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혁신은 과학 실험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기업과 기층 내부에서 나오는 혁신이라야만 매력적인 일자리를 만든다. 외부에서 배우는 혁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지혜와 상상력으로 혁신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능력을 높게 본다.”
이대로 간다면 중국의 혁신 역량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얘기로 들린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달렸다.”(웃음)
그렇다면 미국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미국의 혁신 역량은 1970년대 들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회 전반의 생산성을 가늠할 수 있는 총요소생산성(노동과 자본의 생산성)을 보면 이를 금방 알 수 있다. 72년에만 해도 이 수치는 2.26%를 기록했지만 지금은 1.1% 수준에 머물고 있다. 미국의 모든 지역에서 혁신 역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제 남은 건 실리콘밸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리콘밸리가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다. 실리콘밸리가 미국 경제 전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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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프스 교수는 “1970년대 들어 혁신 역량이 시들면서 미국 경제가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며 “미국이 다시 한번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19세기의 혁신 역량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한우덕 기자]

미국의 혁신 역량이 떨어졌다는 게 충격이다.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진 건가.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과학자들이 상업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과학적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적 진보는 있었는데 R&D투자가 과거처럼 충분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 역시 만족스러운 분석은 아니다. 1920년대와 30년대의 경우 이탈리아 무솔리니 역시 과학재단을 설립하는 등 이 분야에 투자를 많이 했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미국도 국가과학재단을 만들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문제는 혁신의 부재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혁신은 언제나 민간, 기업에서 나오는데 그 분야에서 장애물이 생겨 혁신 역량이 쇠퇴했다.”
미국에도 ‘혁신의 시대’가 있었지 않은가.
“혁신의 역사를 보자. 혁신은 대규모로 발생했다. 영국이 처음이었다. 1815년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기차를 만들고 영국 전역에 철도가 퍼져 나갔다. 생산성은 이때부터 비상(飛上)했다. 신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방법론에 대해 흥분하고 기술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역사 전문가가 현대의 탄생을 1815년으로 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열기가 미국에 전해진 것은 1825~1830년 즈음이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제품과 생산 방법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일반 노동자, 교육자들도 혁신에 매료됐고 참여했다. 링컨 대통령이 연설에서 지적했듯 1855년 미국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국 혁신의 성공은 모든 산업에 걸쳐서 나왔다. 한두 개 산업만 잘해서 된 게 아니다. 전국적으로 사회 저변에서 올라온 혁신이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1970년대 들어 그 혁신 역량이 시들면서 경제가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19세기의 혁신 역량을 되살려야 미국 경제가 살아난다.”
글로벌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수요 부족이다. 혁신은 공급과 관련된 것인데 수요 증가에도 도움이 되는가.
“좋은 질문이다. 혁신은 공급에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수요에도 도움을 준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 1970년대 이후 생산성이 떨어지자 기업은 고용을 꺼려했다. 성장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 어떤 일이든 극복해서 고용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혁신 역량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이는 곧 혁신만이 수요를 늘릴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세계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혁신을 해야 한다.”
세계경제의 화두는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다. 혁신은 포용성장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혁신은 오른쪽으로는 성장에, 왼쪽으로는 포용적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복지의 확대는 혁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실업수당, 실업보험, 퇴직프로그램 등의 복지 정책이 혁신 동기를 줄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국가의 보호가 민간의 창의를 억제하니 말이다. 나도 한두 번 그런 생각을 했지만 통계를 보니 그런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스웨덴의 전문가들은 어느 정도의 사회복지는 혁신에 도움을 준다고 봤다. 국가와 기업이 프로젝트 실패에 대한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가 민간의 혁신 의지를 꺾을 때 발생한다. 시장에 신생 기업이 등장하면 정부는 기존 대기업을 보호해 주려는 경향이 있다. 신생 회사가 시장 점유율을 높이지 못하도록 막는다. 정부가 개입해 기존 기업을 보호하면 그런 종류의 보호는 혁신에 독약이다.”
2010년 신생 기업에만 신용 대출이나 지분투자를 하는 전국 규모의 은행을 설립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었는데 성사가 됐는가.
“질문해 줘서 고맙다. 미국에는 농업 분야만을 대상으로 한 농업신용은행(Farm credit bank)이 있다. 비료·농기계 등을 구입할 수 있도록 농민에게만 돈을 대출해 주는 금융기관이다. 여기에 착안해서 젊은 기업, 신생 기업을 대상으로 그런 형태의 신용기구를 만들자는 게 나의 주장이었다.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재무부가 최근 그와 유사한 금융기금을 설립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의회에서 법안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재무부에서 시행령으로 만들었다. ‘오바마 스타일’이다. 한국도 그런 제도를 도입해볼 만하다고 본다.”
에드먼드 펠프스는…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자본주의의 효과와 영향 등을 연구하는 이 대학 연구소인 ‘자본주의와 사회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2006년 ‘거시 경제 정책의 장·단기 효과의 상호관계’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경제 정책 결정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미해 정책의 적절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 재무부 등의 경제고문을 지냈다. 애머스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1959년)를 받았다. 저서로 『대번영의 조건』 『중산층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Rewarding Work)』 등이 있다.

정리=한우덕 기자 woodyh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