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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의 필드에서 만난 사람] "도핑은 스포츠 갉아먹는 암···고의 아니라도 100% 선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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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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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핑방지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고려대 의대 김한겸 교수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도핑과 반도핑의 숨바꼭질은 계속될 것”이라며 “도핑의 위험과 부도덕성에 대해 지속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오상민 기자]

“도핑은 스포츠 정신을 훼손하고 스포츠의 뿌리를 갉아먹는 암과 같습니다. 고의로 했든 모르고 했든, 도핑에 걸리면 100% 선수 책임입니다. 무관용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도핑은 근절될 수 없습니다.”

김한겸 전 도핑방지위원장
사격 강형철, 감기약에서 금지약물
의사 실수 탓 1년 2개월 자격 정지
사정 다 봐주다보면 근절 불가능

‘반(反) 도핑 전도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수영 선수 박태환(27)의 리우 올림픽 출전과 케냐 출신 마라토너 에루페(28)의 특별 귀화가 무산된 6일, 김한겸(61) 고려대 의대 교수(병리과)는 “사필귀정이다. 약물 복용 전력이 있는 선수는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위원장을 지냈다. 김 교수는 ‘박태환 도핑 파문’이 터진 2014년 9월에도 KADA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박태환은 대표적인 금지약물인 테스토스테론이 검출돼 국제수영연맹(FINA)으로부터 1년6개월 자격정지의 징계를 받았다. 김 교수는 “박태환이 재기해서 명예 회복을 하겠다고 한다.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어린이를 포함한 우리 국민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줬다.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박태환 수영장’에서 딴 아시안게임 메달을 박탈당했다. 박태환은 더 늦기 전에 은퇴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24일 고대구로병원에서 김 교수를 만나 도핑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검도 7단의 아마추어 고수다.

 

최근 테니스 스타 마리야 샤라포바(29·러시아)가 도핑에 걸렸다. 국내외에서 도핑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데.
“도핑은 끊기 힘든 유혹이다. 0.001초 차로 승부가 갈리는 스포츠 세계에서 약물은 강력한 불법 무기다. 약물은 선수의 육체와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암페타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사례가 여러 건 있다. 여성이 테스토스테론을 계속 복용하면 수염이 나고, 심지어 남성으로 성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샤라포바가 복용했다는 멜도니움은 올해부터 금지약물 리스트에 포함됐는데.
“매년 9월에 국제반도핑기구(WADA)가 신규 금지약물 리스트를 발표하고, 다음해 1월 1일부터 적용한다. 일반 의약품으로 개발됐는데 선수가 먹고 효과를 봤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체크를 시작한다. 지속적으로 경기력 향상에 도움을 줬다는 확증이 나오면 도핑 검사 리스트에 올린다.”
박태환과 에루페를 포함해 많은 선수들이 “모르고 맞았다”고 주장하는데.
“모르고 맞았든, 알고 맞았든, 잠자는 새 맞았든 금지약물 양성반응이 나오면 그 책임은 100% 선수에게 있다. 이런저런 사정 봐 주다가는 도핑을 근절할 수 없다는 게 WADA의 확고한 ‘무관용 원칙’이다.”
정말 억울한 경우도 있지 않겠나.
“맞다. 2011년 사격선수 강형철(34)이 그런 경우였다. 감기 기운이 있어 병원에 가서 ‘국가대표 사격 선수다. 도핑에 걸리면 안 되니 잘 처방해 달라’고 해서 처방전을 받았다. 그런데 그 감기약에서 금지약물 성분이 나와 1년2개월 자격정지를 당했다. 처방전을 준 의사가 WADA에 가서 ‘내 실수다’고 증언했지만 소용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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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핑’ 하면 떠오르는 선수가 88 서울올림픽을 떠들썩하게 했던 육상의 벤 존슨(캐나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45·미국)이다. 김 교수는 “최근의 도핑 적발 테크닉과 시스템은 거의 암스트롱 때문에 생겼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도핑 역사를 암스트롱 전과 후로 나눈다던데.
“그렇다. 그는 테스토스테론·에리트로포이에틴(EPO) 등 다양한 약물을 복용했고, 도핑 검사를 피하기 위해 피신·감시·허위 처방전 발급 등 갖은 방법을 다 썼다. 동료에게 약물을 하라고 권유하거나 협박했고, EPO 주사기를 보급하기도 했다.”
‘선수 소재지 보고’도 암스트롱 탓에 생겼다.
“맞다. 암스트롱이 하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니까 WADA에서 ‘일정 기간 소재지를 보고하지 않으면 도핑을 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 바람에 배드민턴 이용대(28)가 억울하게 1년 자격정지를 받았다. 나중에 대한배드민턴협회의 행정 착오라는 게 밝혀져 징계가 취소됐다.”
우리나라 도핑 테스트 수준이 높은가.
“도핑 검사는 WADA가 지정한 곳에서만 할 수 있고, 결과는 모두 WADA로 올라간다. 한국에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만 할 수 있는데, 스펙트로미터라는 초정밀 측정기구를 사용한다. 우리의 높은 의학 기술을 바탕으로 도핑 적발 테크닉을 개발하면 세계에 수출할 수 있다. 또 엘리트 선수들의 도핑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신물질이나 신약을 개발할 수 있고, 환자를 돕는 데 쓸 수도 있다.”

글=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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