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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스님, 레스터시티 라커룸엔 어쩐 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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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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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레스터시티의 라커룸을 찾은 태국의 승려가 선수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 레스터시티의 스트라이커 제이미 바디(왼쪽)가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사진 프리미어리그 트위터]

잉글랜드 프로축구 구단 레스터시티는 요즘 영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구단이다. 팀당 6~7경기를 남긴 5일 현재 레스터시티는 승점 69점(20승9무3패)을 기록해 2위 토트넘(승점 62)을 승점 7점차로 따돌리고 단독선두를 달리고 있다. 시즌 전 1부 리그 잔류가 목표였지만 이젠 1884년 창단 후 132년 만에 처음으로 1부리그 우승까지 넘보고 있다.

면세점 운영 태국 사업가가 구단주
2010년 2부리그 팀 645억에 인수
투자 늘리며 132년 만에 우승 눈앞

태국 축구 팬들 ‘국민구단’ 환호
승려들은 선수 찾아 사기 돋우고
사찰에선 우승 기원 법회도 열어

‘깜짝 우승’을 눈앞에 둔 레스터시티의 질주를 남다른 시선으로 지켜보는 나라가 있다. 레스터시티 구단주의 나라 태국이다. 태국 소매유통기업인 킹 파워의 회장 비차이 스리바다나프라바(58)가 운영하는 레스터시티가 프리미어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소식에 태국 축구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는 2000년대 들어 중동·러시아·미국 등 해외 자본의 유입으로 축구를 넘어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러시아)의 첼시, 셰이크 만수르(아랍에미리트)의 맨체스터시티 등 선수 못지 않게 구단주의 이름도 함께 부각됐다. 레스터시티가 빅 클럽은 아니다. 이번 시즌 레스터시티는 약 486억원의 이적료를 썼다. 프리미어리그 20개 팀 중 13위다. 선수단 몸값도 1570억원으로 첼시 등 빅클럽의 4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도 올시즌 선두를 달리고 있다.

스리바다나프라바 회장은 1989년 킹 파워를 설립한 뒤 태국 공항 면세점 사업을 위주로 20여년 만에 해마다 약 680억바트(약2조2300억원)의 수익을 내는 알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젊은 시절 폴로(말을 타고 하는 구기 종목) 선수였던 그는 2008년 영국 런던 연고의 한 폴로 클럽을 운영하면서 축구팀에도 눈독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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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시티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2010년 8월. 당시 챔피언십(2부리그)에 있던 레스터시티를 3900만파운드(약 645억원)에 사들였다. 그리고 2011년 2월 정식으로 구단주가 되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 등 1000억원이 넘는 수퍼스타들의 몸값보다 싸게 구단을 인수한 뒤 재미를 톡톡히 봤다. 연간 약 700만파운드(115억원)씩 쌓였던 채무를 2013년 12월에 모두 갚았고, 2013-2014 시즌 챔피언십 우승으로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한 뒤엔 투자를 늘리면서 팀 전력을 다졌다.

스리바다나프라바 회장의 아들이자 구단 부회장인 아이야왓은 “많은 자금과 시간을 투자한 덕분에 오늘의 레스터시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레스터시티 팬들과의 관계도 돈독하다. 스리바다나프라바 회장은 생일이었던 지난 3일 사우스햄턴전을 지켜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모든 관중에게 맥주와 도넛을 선물했다. 지난 시즌에도 강등권에서 탈출하자 전 관중에게 맥주를 돌렸던 그는 지난해 12월 일찌감치 “리그 홈 최종전(다음달 7일 에버턴전)에 전 관중에게 맥주를 돌리겠다”고 공약을 했다. 구단주의 깜짝 선물에 레스터시티 팬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고맙습니다. 회장님(Thanks, Mr. Chairman)’이라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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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새겨진 레스터시티의 엠블럼 앞에서 우승을 기원하는 태국 승려. 뒤는 구단주 비차이 스리바다나프라바. [사진 프리미어리그 트위터]

레스터시티는 이제 태국 축구팬들 사이에선 ‘국민 구단’이 됐다. 영국 BBC는 지난달 27일 ‘레스터시티의 유니폼이 방콕 국제공항에서 가장 인기있는 상품이 됐다. 방콕 시내에선 레스터시티 유니폼을 구하기 힘들어졌다’고 소개했다.

레스터시티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대형 TV스크린이 있는 술집마다 태국 팬들이 모여서 응원을 한다. 태국의 축구 해설위원 아라카츠 켐툭탕 씨는 “레스터시티의 성장은 많은 태국 팬들에게 강한 인상과 영감을 남겼다”고 분석했다.

불교 국가답게 태국 승려들도 레스터시티의 우승을 기원한다. 최근 태국의 여러 사찰에선 레스터시티의 우승을 위한 법회가 열리고 있다. 스리비다나프라바 회장은 틈틈이 태국에서 승려를 초청해 레스터시티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운다.

레스터시티 스트라이커 제이미 바디(29)는 “승려들이 성스러운 물을 묻힌 막대기로 선수들의 무릎이나 발을 가볍게 때린다. 태국식 문화인데 우리는 이런 의식을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3년동안 레스터시티 선수들을 돕고 있는 프라 프롬망칼라한이라는 승려는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레스터시티가 이번 시즌 1위에 오를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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