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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6)-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59) 정용만|한국시의 일본어 역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김소운은 그 해에 어깨가 으쓱해져 암파문고에서 출판한 『조선동요선』과 『조선민요선』을 가지고 서울에 나타났다. 그때 암파문고에 낀다는 것은 별따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이어서 김소운은 이 두 권의 책을 자랑하며 다녔다. 그리고 조선교육회의 후원을 얻어 보통학교의 과외잡지 「아동세계」 「신아동」 「목마」등을 출간하였다.
잡지 이름이 변해간 것은 자본주가 갈릴 때마다 잡지 이름을 바꿔 갔기 때문인데, 소운은 잡지편집에 몹시 까다로와 삽화도 마음에 안 들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그리게 하였다. 이때 잡지의 삽화와 커트·표지를 그린 사람이 이상이었다. 소운이 동경에서 가져온 아동잡지를 견본으로 내놓고 이대로 그리라고 하면 이상이 그대로 그렸다.. 이 잡지사에 박태원·정인택 등이 자주 출입했으므로 그때 거기서 이들이 서로 알게 된것이다.
김소운은 이 때문에 이상의 생활과 작품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더욱 이상한 인연은 이상이 그 뒤 1937년 동경에 갔다가 폐결핵으로 동대부속병원에 입원해서 4월에 별세했는데, 그때 동경에 있던 소운이 우연히 그의 임종을 보았다는 것이다.
4년 동안 아동잡지를 주무르다가 소운은 다시 동경으로 가서 1940년에 『젖빛(유색)의 구름』이라는 우리 나라 현대시인 40명의 시 1백여 편을 추린 일본어 역판을 냈다.
일본 근대시의 조종인 도기등촌이 서문을 쓰고, 좌등춘부의 『조선의 시인을 일본 시단에 맞이하는 사』라는 소개문이 있었다.
후기로 소운이 26페이지에 걸치는 조선 시단의 약사와 각 시인의 시풍·시력을 설명하는 발문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일본 독자는 우리 나라 현대시의 전모를 알 수 있었다.
1942년엔 다시 한국 사화집 『삼한 옛 이야기』(동경 학습사간), 동화집 『우종』(동경 동아서원간), 동화집 『푸른 잎사귀』를 간행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시집 (전기)』 『조선시집(중기)』을 동경 오풍관에서 발행하였다.
이것으로 해방 전까지 일본에서의 김소운의 저작활동을 대강 이야기하였는데,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 소운의 나이가 38세였다.
1930년대까지 소운의 업적은 일본 사람들에게 한국 민요·동요, 그리고 현대시의 아름다움을 소개해 우리 민족이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고유한 시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데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부터 그는 많은 수필을 썼다. 가령 『목근통신』 같은 것은 1951년 일본의 대표적 고급 종합잡지인 「중앙공론」에 전문 게재됐는데, 우리가 그들 일본 사람들에게 40년 동안 하고 싶었던, 쌓이고 쌓였던 말을 솔직히 털어놓아 일본 지식인의 크나 큰 공감을 얻었다.
그 뒤 1952년 유네스코 초청으로 국제예술가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동경을 거쳐가는 길에 자유당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에 발이 묶여 13년 동안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5년에야 귀국하였다.
그 동안 많은 수필집을 냈고, 1975년 『한국미술전집』15권의 일본어역을 끝내는 동시에 『현대한국문학선집』 전5권의 일본어역도 끝냈다.
1980년 위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고, 그것의 예후가 좋지 않아 1981년에 별세하였다.
팔봉 김기진은 소운을 가리켜 『양심·정의·자유·비분의 시인』이라고 했고, 시인 구상은 『그분의 저작과 문장을 아무렇게 들추어보아도 도처에서 눈에 띄는 향토와 민족을 향해 불타는 지계과 충정! 이제까지의 그의 문필, 그 전부가 이에 그쳤다고 해도 과장이나 과찬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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