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 “언어로 돈을 버는게 처칠 능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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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5일 미국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대학 체육관에서 45분간 철의 장막 연설을 하는 처칠, 왼쪽 앞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 [중앙포토]

1953년 영국 총리 처칠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 평화상이 아니다. 그해 문학상 유력 후보는 헤밍웨이였다. 그만큼 의외였다. 수상작은 처칠의 회고록 『2차 세계대전』이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 이유는 이렇다. “역사적이고 전기(傳記)적인 글에서 보인 탁월한 묘사와, 고양된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빼어난 웅변술” 덕분이다(for his mastery of historical and biographical description as well as for brilliant oratory in defending exalted human values).

처칠과 문학상의 조합은 어색하지 않다. 그는 전업 작가보다 많은 글을 썼고 책을 냈다. 처칠은 43종(72권)의 책을 출판했다. 신문과 잡지에 1000여 개의 글을 기고했다. 『2차 세계대전』은 205만 단어를 넘는다. 그는 20대 초반 쿠바와 인도의 전쟁터에 있었다. 신문에 전쟁 기사를 썼다. 그는 보어전쟁 현장에 갔다. 그때는 종군기자였다. 그는 참전 경험을 책으로 냈다. 베스트셀러가 됐고 큰돈을 벌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겸 역사학자인 폴 존슨은 “처칠의 능력은 전쟁을 언어로 바꾸고 언어를 돈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처칠은 말의 힘을 일찍 터득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재능 중에서 연설 재능이 최고다. 연설을 즐기는 사람은 위대한 왕보다 오래 권력을 행사한다”(『수사학의 발판(The Scaffolding of Rhetoric)』, 1897년). 그는 훌륭한 연설과 연설가의 공통점을 이렇게 집약했다. "눈에 띄는 존재감, 정확한 어휘 사용, 운율, 논쟁의 축적, 비유의 적절한 구사”. 처칠은 언어의 조련사다. ‘정상외교’란 말은 처칠이 만들었다. 그는 경쾌한 유머를 내놓았다. 처칠이 의사당에 지각했을 때다. 의원들 비판에 그는 “여러분도 나처럼 예쁜 아내와 살면 아침 일찍 일어나기가 힘들 것”이라고 넘겼다. 처칠은 많은 명언을 제조했다. 그 말 속엔 통찰과 지혜가 넘친다.

풀턴의 ‘처칠 박물관’에는 그의 어록이 널려 있다.

▶The price of greatness is responsibility(위대함의 대가는 책임감).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과거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Never give in! in nothing great and small, large and petty, 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ur and good sense(절대 굴복하지 말라-위대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크고 작든, 명예와 선의를 제외하고는 어느 것에도 굴복하지 말라).

▶A fanatic is one who can’t change his mind and won’t change the subject(광신자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도 없고 화제를 바꾸지 않는다). ▶To jaw-jaw is always better than war-war(협상은 언제나 전쟁보다 낫다). ▶Broadly speaking, the short words are the best, and the old words are best of all(대체로, 간결한 말이 으뜸이며, 그중 친근한 단어가 최고다).

처칠은 다재다능했다. 그는 평생 5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 ‘차트웰의 금붕어 연못’은 2014년 소더비 경매에서 280만 달러에 팔렸다. 그의 사저였던 차트웰은 관광명소다.

‘철의 장막’ 나치 괴벨스도 썼지만 주목 못 받아

‘철의 장막’은 처칠 연설 전에도 존재했다. 그 말은 극장에서 방화용 안전장치를 뜻했다. 1918년 러시아 작가 바실리 로자노프(Vasily Rozanov)는 “러시아 역사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있다”고 했다.

영국 여성인권운동가 스노든(Ethel Snowden)은 그 용어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공산주의 러시아를 ‘뚫을 수 없는 장벽’ 이라고 했다(1920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 괴벨스(Joseph Goebbels)는 ‘소련, 철의 장막 뒤쪽에”란 글(1943년 5월)을 썼다. 하지만 그의 글귀는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 용어의 제조자는 처칠이 아니다. 하지만 말의 파괴력은 때와 장소, 인물의 삼박자가 맞아야 생긴다. 처칠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결정타를 날렸다. 공산주의는 장막 너머의 어두움과 동일시됐다. 처칠의 철의 장막은 역사 언어의 전당(殿堂)에 올랐다. 그 용어는 파생됐다. 냉전 시대에 중국은 ‘죽(竹)의 장막’으로 불렸다.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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