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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알파고에게 가르친 한 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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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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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그것은 세기의 드라마였다.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20세기 문명의 상징이라면,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접전은 21세기 문명을 개막하는 팡파르였다. 바둑은 상대의 피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지막 대국을 마친 이세돌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전날 승리했을 때와는 다른 침울한 표정이었다. 아니다. 애초부터 초점은 누가 이길 것인지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얼마나 해낼 것인가에 있었다.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이 세계 바둑계의 최고수를 이겼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이제야 냉정하건대 이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그 게임에서 인간 이세돌이 한판을 얻어냈다는 사실도 놀랍다.

이세돌은 유종의 미를 거뒀다. 그것은 21세기 문명의 장엄한 출발을 알린 세기적 대사건이었다. 인간의 뇌세포(뉴런)는 약 1000억 개, 연결고리인 시냅스(synapse)는 100조 개에 달한다. 그런데 중간마디가 고작 830만 개인 알파고가 이겼다는 사실은 인간 뇌에서 차지하는 셈 능력은 아주 작고 나머지는 감정·이성·느낌이라는 뜻이다. 팽팽한 대접전의 관전 포인트는 제각각이었다. 공학자들은 알파고가 멋지게 해낼 것을 은연중 염원했다. 과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기에. 역으로 인문학자들은 인간 이세돌이 저 무심하고 오만한 기계를 무참히 굴복시키기를 원했다. 프로기사들은 바둑계의 자존심을 지켜주기를 갈망했다. 어떤 해설자는 4국에서 승리하자 벅찬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사회학자인 필자는 알파고의 표정이 어떨까를 쓸데없이 궁리했는데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고차원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된 연산기계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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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국 마지막 화면에 떠오른 말, ‘알파고는 포기한다(AlphaGo resigns)’는 표현에 필자는 주목했다. 그것은 일인칭이 아니라 3인칭이었다. 패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굴복한다’(surrender)도 아니었다. 이세돌이 3국까지 패배에서 당혹·체념·두려움 같은 변화무쌍한 표정을 비췄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알파고는 진땀도 흘리지 않았다. 구글의 데미스 허사비스와 그의 스태프들이 대신 당혹해했다. 알파고는 복합적 감정을 연출하는 주체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3인칭이었고, 20세기의 폭력적 단어 ‘굴복한다’가 아니었다. 3국까지의 패배가 자아냈던 그 ‘으스스한 느낌’은 따라서 근거가 없다. 이세돌의 4국 78수가 베일에 가린 무의식의 공간에서 끌어올린 천재의 묘수였듯이 알파고는 셈 능력의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웠다.

이젠 이걸 질문해야 한다. 알파고의 연산 능력과 이세돌의 뇌가 결합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거야말로 으스스한 풍경이다. 호모 사피엔스를 멸종시킬 새로운 종의 탄생을 예고한다.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블루 브레인 프로젝트(Blue Brain Project)’는 이미 10년 전에 시작됐다. 인간의 감정을 생산하는 오묘한 마음밭이 컴퓨터에 이식되는 것이다. 지적 설계로 자연선택을 변형하는 과학실험이 지속된다면 인지 능력을 무한정 확장한 감정적 주체가 태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면 인간이 애지중지했던 모든 사회과학적·인문학적 개념은 유효성을 상실한다. 생명 정체성이 교체되고 법질서가 바뀐다. 『호모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예견은 좀 섬뜩하다. “적어도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은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의 후계자들은 신(神)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신 비슷한 존재에겐 사랑·우정·가정·직장·생계·행복 같은 인류사적 개념은 크게 변질되고, 자본주의 역시 요동칠 것이다. 『에로스와 문명』의 저자 마르쿠제(Marcuse)가 기계문명이 인간을 육체노동에서 해방시킨다는 낙관적 명제를 내놓은 것이 불과 50년 전의 일이다. 인류사에서 미증유의 경제성장이 일어난 때였다. 지난 50년간은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이 우세하기는 했다. 그런데 감정을 갖춘 인공지능의 탄생은 어떨까를 짐작하기란 너무나 난감한 상황이다. 마치 바이러스가 자기 증식을 하듯, 입력한 프로그램이 가치망이나 감정망과 혼선을 일으킨다면 감성 주체가 생성된 인공지능이 기상천외의 행동을 감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성과 야성을 다소곳이 다스리는 최고의 사령관은 도덕감정(moral sentiments)이다. 인간도 최고의 품성인 도덕감정을 배양하는 데 여태껏 실패했음은 오늘도 도처에서 발생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보면 안다. 오죽 했으면 애덤 스미스(A. Smith)가 『국부론』의 대전제로서 도덕감정론을 설파했겠는가? 도덕을 자율 생산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은 재앙이다. 유발 하라리의 결론도 그랬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가 진짜 중요한 질문이라고. 욕망을 들여다보란 얘기다. 21세기 문명의 개막전에 외롭게 나섰던 이세돌은 한국인의 도덕감정을 냉혹한 연산기계 알파고에 전수했을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