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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폭력적인 영화를 만들고 향유하는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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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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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청년기에 홍콩 누아르나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우리는 언제쯤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부러워한 적이 있다. 2000년이 시작되던 무렵에는 “아, 우리도 이제 영화를 잘 만드는구나” 감탄한 적도 있다. 얼마 전부터 또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 영화를 못 보겠구나.” 한국 영화의 잔혹함과 폭력성을 소화시킬 수 없다는 느낌이다. 내 감각이 치우친 걸까 싶어 사석에서 그 문제를 화제에 올려 보았다. 한 영화평론가는 말했다. “외국 영화제에서도 자주 질문을 받는대. 한국 영화는 왜 그토록 폭력적이냐고.”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이도 말했다. “제작자들이 시나리오 단계부터 극강의 폭력성을 요구한대.”

모든 예술이 그 향유자에게 제공하는 특별한 기능에는 ‘무의식적 자기 표현’ 측면이 있다. 저마다 내면에서 감지하지만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림 형제의 잔혹 동화가 오랜 세월 아이들에게 읽혀 온 이유가 그것이다. 한국 영화가 폭력성과 잔혹함을 버무려 넣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날것인 폭력성, 절제 없는 잔인함을 대할 때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런 영화를 제작, 향유하는 이들의 내면에 억압된 공격성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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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은 불행한 현대사를 지나오면서 우리 내면에 축적돼 온 분노, 기어이 대물림된 분노가 표현되는 방식일 것이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남자들이 폭발시키듯 분노를 표출하는 현상과 같은 일로 보인다. 그것은 또한 여성들이 향유하는 ‘꽃미남 상품’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페미니스트들이 ‘미스코리아 상품’에 제동을 걸었듯 어떤 남성들은 동족을 예쁘게 꾸며 여성을 위한 상품으로 제공하는 일이 불편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남성성이라 분류된 기호와 스토리텔링을 적극 표현, 유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최근 한 대학생의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왜 폭력적인 영화를 거부감 없이 즐기는 걸까요?” 그제야 그들의 특별한 온순함이 눈에 들어왔다. 일상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청년이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순응적인 외양을 하고 있다는 점도 떠올랐다. 불안을 억압한 채 열심히 살았던 그들의 부모 세대가 자녀를 성공적으로 통제한 결과물로 보였다. 젊은이들이 내면에 억압해 둔 채 인식하지 못하는 공격성은 한국 영화의 폭력성과 그 강도에서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된다. 즐길 영화가 적어지는 점이 안타까워 말이 길어졌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