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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공공기관 지역행사 땐 동네 소상공인에게 일 맡겨줬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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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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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진채 대영사진실 사장이 7일 자신의 사진실에서 애지중지하는 카메라를 손보고 있다. [사진 김상선 기자]

안녕하세요, 저는 57세 사진사입니다. 서울 중구 중림동 아파트 단지 앞 상가의 지하에서 ‘대영사진실’이라는 동네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어요.

40년간 사진 찍는 일만 해왔는데
디카·폰카에 사진관 설 자리 줄어

어엿한 제 사진관을 열기까지는 고생도 많았습니다. 1977년 서울 신정동의 한 사진관에 들어가 무보수로 숙식만 겨우 해결하며 사진 기술을 배웠어요. 잠은 사진관 소파에서 잤지요. 그래도 대접받는 어엿한 기술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2년여 만에 다른 사진관에 기사로 취직했습니다. 7년여 뒤에는 그동안 모은 월급에다가 빚도 조금 내서 드디어 제 가게를 열었습니다. 잠잘 데도 제대로 없어서 돌이 갓 지난 아기까지 온 가족이 암실 바닥에서 자면서도 행복했습니다.

지금 운영하는 사진관은 제가 처음 사진기사로 일했던 곳입니다. 95년에 예전 사장님이 은퇴를 하시면서 저한테 인수를 권하셨어요. 초보 사진 기사로 일하던 곳에 사장님으로 돌아온 거지요. 사실 이름은 그대로지만 예전 사진관이 있던 자리는 아닙니다. 그동안 이 근방에서 네 차례 정도 옮겨다녔어요.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사진관 꾸리기가 어려워서요.

사실 저는 인기 있는 사진사였습니다. 사진을 수정하는 기술이 좋았거든요. 필름을 현상하면 검은 부분이 하얗게 나오는데요, 이 부분을 검게 칠해주면 점도 주름도 사라지는 거지요. 밤새 확대경으로 필름을 들여다보며 사포로 바늘 끝처럼 뾰족하게 다듬은 연필 끝을 이용해서 조심조심 수정을 했습니다. 성당 결혼식 전속 사진사처럼 일하면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은 신혼부부의 모습을 아름답게 담았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고 사진가협회에서 교육을 한다고 할 때도 처음엔 거부했습니다. 속으로 ‘컴퓨터가 다 한다고 해도 사람 손으로 하는 사진 수정만큼은 어떻게 못할 거다’ 생각했지요.

하지만 변화의 속도는 빨랐습니다. 저도 살아남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사고 포토샵을 익혔습니다. 변화를 거부하던 근처 사진관 7곳이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모든 것이 장비 싸움이 되다 보니 사진 수정 기술도 이젠 첨단 설비를 갖춘 젊은이들에게 밀린다 싶습니다.

제가 일을 시작할 땐 사진사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기술자 특유의 자부심도 강했습니다. 대한직업사진관협회 마포지부 소속인 중구·서대문구·마포구 사진관들이 150개쯤 됐습니다. 요즘은 50개 정도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저도 수입은 예전의 절반도 안 되는 데 월세만 계속 오르니 몇 번이나 사진관 문을 닫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이 제 일인 걸요. 더 싼 가게를 찾아 계속 이사를 했고, 권리금이 없는 지하 가게를 구해 지금도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열심히 익힌 덕분에 오래된 사진을 복원하는 일도 가능해졌습니다. 제가 복원한 부모님의 옛 사진을 보며 환하게 웃는 손님들을 볼 때면 자부심을 느낍니다.

모두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메모리로 사진을 보관하니 동네 사진관을 찾는 이는 점점 줄어듭니다. 저도 증명사진을 찍거나 가끔 가족 사진을 촬영하는 일이 전부입니다. 오랫동안 사진 일을 한 덕에 주변 동네 분들이 물어물어 저희 가게를 찾아와 주시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생활을 온전히 유지하긴 힘듭니다. 그래도 얼굴을 아는 이웃 사람들의 증명 사진과 가족 사진을 찍어줄 사진관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꿋꿋이 동네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저를 포함해 동네를 지켜내던 수많은 자영업자가 힘든 시기입니다. 공공기관이 지역 행사를 할 때 동네 소상공인들부터 불러서 일을 맡긴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 같은 기술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앞으로도 제가 힘 닿는 데까지 제 일을 이어갈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랍니다.

범진채 대영사진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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