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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안 개구리인 조국 위해 교사 될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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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호 1 면

1902년 12월 7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도산 안창호 선생 인터뷰 기사 지면. 하단엔 도산 부부의 사진이 보인다. [샌프란시코 크로니클, 사진 장태한 교수]

‘청년은 당당했다. 먼 이국땅에서의 낯선 환경과 풍습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았다. 겸손했지만, 패기는 잃지 않았다’.


114년 전 미국의 한 신문 기사에 등장한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모습이다. 24세의 안창호,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갔던 1902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12월 7일자에 실린 인터뷰 기사가 재미 한국 학자에 의해 발견됐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1865년 창간해 현재도 발행되는 미국 서부의 유력 일간지다. 기사는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파차파 캠프:미국의 첫 코리아타운’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찾아냈다. 도산이 미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Riverside) 한인촌에 꾸렸던 ‘첫 코리아타운’ 실험과 그의 리더십을 소개한 논문은 올해 11월 도산학회 세미나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도산학회 윤경로(전 한성대 총장) 회장은 “도산이 미국 신문과 인터뷰한 사실은 알려졌지만 기사의 구체적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도산의 청년 시절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기사 제목은 ‘한국(Corea), 잠자는 나라’였다. 전면 인터뷰 중 3분의 2가량은 당시 한국의 사정을 소개하는 데 할애됐다. 기사 중엔 “한국인은 귀신을 섬기며 여성은 자유가 없다”는 대목도 들어 있다. 당시 도산은 스무 살이 훨씬 넘었지만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차근차근 배우려는 목적으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이게 화제가 돼 현지 언론이 인터뷰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 당시 도산 부부는 영어를 전혀 못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2년간 의료선교 활동을 했던 알레산드로 드류(1859~1926) 박사가 통역을 맡았다. 인터뷰가 진행된 드류 박사 집 거실엔 도산이 큰 태극기를 걸어놨다. 미국인 기자는 태극기에 대해 “가운데 원이 그려졌는데,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졌다. 바깥에는 도미노 같이 생긴 네 쌍의 검은 선이 있다”고 썼다.


도산은 인터뷰에서 “나는 미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지금 한국 민족은 ‘우물 안 개구리(the frogs at the bottom of the well)’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렸을 땐 서양인을 악당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울에서 학교(구세학당)를 다니면서 서양인을 본 뒤 달라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국에 나가면 행색이 초라하게 마련인데, 서울의 외국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본국은 얼마나 대단할까’라고 궁금해했다”며 “친구인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의 조언을 듣고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도산의 장래 희망은 교사였다. 그는 “동포를 도우려면 외과의사가 되는 게 좋겠지만 마음이 약해 수술을 집도할 자신이 없다”며 “교사가 장래 희망”이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여기서 보고 배운 모든 걸 한국으로 가져갈 순 없겠지만, 1000가지 중 단 하나만이라도 보석과 같은 핵심을 얻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후원을 받고 지인들이 도와줘 여비를 마련했다. 귀국하면 다 갚고 싶다”며 “그들이 내게 보여준 신뢰에 대해 부담이 크다”고도 털어놓았다. 미국인 기자는 허리를 세우고 반듯이 자리에 앉은 도산의 모습을 보고 “기품 있다(dignified)”고 썼다. 도산은 인터뷰 내내 예의 바른 태도를 잃지 않았지만 “높은 깃의 셔츠를 처음 입었을 때 칼을 찬 죄인인 것처럼 느껴졌다”는 농담도 곁들였다.


도산 부부의 사진을 찍는 과정에선 해프닝도 있었다. 도산은 “한국의 양반 여성은 남성과 함께 사진을 찍지 않는 게 관습”이라며 사진 찍기를 거부했으나, 드류 박사가 자기 부부의 사진을 보여준 뒤에야 겨우 고집을 꺾였다. 도산은 “미국에서 이게 관습이고, 내 아내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괜찮다”며 결국 촬영을 허락했다.


앞서 도산은 1902년 9월 4일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신(新)문화를 배우기 위해 인천에서 기선을 탔다. 결혼한 지 넉 달 만이었다. 도쿄→하와이→샌프란시스코의 여정이었지만 하와이에서 배를 잘못 갈아타 캐나다 밴쿠버로 갔다.

2001년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회장 홍명기)가 리버사이드 시민광장에 도산 동상을 세웠다.

이후 미국 시애틀을 거쳐 그해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빈털터리였던 그가 지인인 드류 박사를 차이나타운에서 우연히 만난 건 행운이었다. 도산은 인터뷰 당시 드류 박사의 집사로 일하며 그의 집에 머물렀다. 드류 박사는 “서울에서 본 도산은 뛰어난 웅변 능력을 갖춘 똑똑한 젊은이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본사를 견학한 도산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장태한 교수는 “도산이 이후 ‘공립신보’(1905년), ‘신한민보’(1909년) 등 신문을 창간했는데 이때 견학을 통해 신문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 배운 지식을 고국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는 게 도산의 꿈이었지만 그는 미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나서면서 결국 학업을 접었다. 1904년 3월 23일 로스앤젤레스(LA)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90㎞ 떨어진 리버사이드로 거처를 옮겼다.


리버사이드에선 당시 오렌지·레몬·포도 농사에 한인들이 인부로 많이 고용됐다. 도산은 파차파(Pachappa)가에 리버사이드 한인 공동체를 세웠다. 이 한인촌엔 독자적 직업소개소·마을회관·한인 교회와 영어를 가르치는 야학도 있었다. 리버사이드는 한인들 사이에 ‘하변(河邊)’으로 불렸고, 미국 대륙의 첫 코리아타운이었다. ▶오후 9시엔 불을 끄고 ▶여성은 거리에서 긴 담뱃대를 물지 못하며 ▶속옷 차림으로 외출하지 않는다는 자치규약이 있었고 마을경찰도 운영됐다. 리버사이드 한인촌이 번창하며 한인에 대한 미국인의 시각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1911년 리버사이드 한인촌을 방문한 강명화 대한인국민회(KNA) 북미지방총회장은 그곳을 ‘도산 공화국(Dosan’s Republic)’이라고 불렀다. 장 교수는 “리버사이드 한인촌에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도산은 이후 한국과 미국,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고, 이듬해 3월 10일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오는 10일은 그의 서거 78주기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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