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와 옥시토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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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호 22면

일러스트 강일구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영화 ‘룸’을 개봉 전에 보았다. 줄거리는 이렇다. 17세 소녀 조이는 괴한에게 납치되어 창고 같은 좁은 방에 갇혀 살다 아들 잭을 낳고 또 5년을 살고서야 탈출에 성공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요제프 프리츨이란 노인이 24년간 딸을 밀실에 가두고 성폭행해서 아이까지 낳게 했던 엽기적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처음엔 올드보이같은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지며 악당에게 복수하고 탈출하는 이야기일까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화면에는 의외로 엄마와 아들의 소소한 일상이 펼쳐졌다. 두 사람은 좁은 방안에서 운동을 하고, 목욕을 하고, 생일 케이크를 만들고 그림책을 읽으면서 보통사람들처럼 살았다. 더욱이 탈출이 영화의 절정이 아니라, 그 이후 세상에 다시 적응하는 과정에 큰 비중을 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이 고립속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나는 그녀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원치 않는 임신이었지만 아들 잭을 낳아 키운 게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식을 모성애로 돌보는 행위가 스트레스 극복에 최고의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자기 한 명 건사하기도 힘들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스트레스와 연관한 옥시토신의 힘 덕분이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에 대해 인간의 대처는 ‘회피-투쟁’ 반응이다. 싸울지, 도망갈지 결정하고 아드레날린과 코티졸이 분비돼 반응해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그런데 최근 켈리 맥고니걸은 『스트레스의 힘』이란 책에서 스트레스에서 옥시토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본래 옥시토신은 출산후에 급격히 증가해 자궁을 수축하는 역할을 하는 호르몬이다. 어미가 자식을 돌보는 것을 촉진한다. 이 호르몬은 평상시에도 친밀감을 느낄 때 분비된다. 그런데 최근 스트레스 상황에 옥시토신의 분비가 증가하고, 친사회적 배려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결과 다른 사람과 친화력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연대를 하게 되고,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옥시토신은 뇌의 공포반응을 둔화시켜서 용감해지게 만든다.


아마도 조이가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아이를 돌보는 행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옥시토신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배려하고, 돌보고, 함께 하는 행위는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을 강화시켜 건강함을 유지시켜 줬다. 덕분에 조이는 자신을 피해자로만 보지 않고 누군가를 돌보는 의미있는 사람으로 여기며 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스트레스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좌절과 무력감속에 질질 끌려가거나 자신의 괴로움을 덜어내기 위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만 갖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함께 힘들어하는 사람을 도우면서, 배려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것이 스트레스 상황을 잘 극복해낼 수 있는 지름길이다. 우리 뇌도 옥시토신을 분비해서 이같은 이타적 행동을 적극 권장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다. 결국 이타적 행동은 여유가 있을 때보다 극한상황을 벗어나는 데 더 중요한 기능을 한다. 힘든 상황일수록 배려와 연대를 바라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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