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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들인 '워룸'서 사이버전 훈련…화이트 해커 28명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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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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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고려대 하나스퀘어 강당에서 따로 열린 사이버국방학과 1기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졸업생들.

고려대 졸업식(25일)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오전 교내의 한 지하 강당.

사이버 전문장교 첫 배출한 고려대

 학사모를 쓴 28명이 모여 그들만의 졸업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졸업식 안내장에는 ‘대외비’ 표시와 함께 ‘학생들의 개인 신상정보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 졸업생은 “졸업식만 별도로 하는 게 아니라 졸업앨범도 따로 제작해 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 ‘비밀’ 졸업생은 국방부가 고려대와 함께 2011년에 개설한 사이버국방학과의 1기생이다. 북한의 해킹 공격 등 각종 사이버 테러를 방어할 사이버 전문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28명 중 남학생 25명, 여학생은 3명이다. 이들은 다른 일반학과와는 달리 입학 과정에서 신원 조회는 물론 육군사관학교 수준의 엄격한 신체 검사도 거쳤다.

 비밀 졸업식을 치르는 이유는 신변 노출을 피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사이버국방학과는 4년의 학사 과정 동안 학생 이름은 물론 커리큘럼도 공개하지 않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

수강 신청을 할 때 과목은 ‘17’ ‘28’ 등 숫자로만 표시되고 정식 과목명은 학생들에게만 개별적으로 알려 준다. 한 학생은 “대회에서 상을 받아 학교에 현수막을 내걸 때도 이름 중 일부를 지운 뒤 게시한다”고 했다.

학과 관계자는 “고급 기밀정보를 다루는 사이버 장교의 특성상 신원이 노출됐을 경우 북한의 테러나 해커들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이버국방학과는 2011년 농협 해킹 사태를 계기로 창설됐다. 학과 설립을 주도한 임종인 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 교수는 “금융기관인 농협의 전산망이 해킹 공격으로 마비되면서 사이버 테러가 단순히 보안의 문제가 아닌 안보 문제가 됐고 해당 사건을 계기로 국방부 공모를 거쳐 사이버국방학과가 개설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학에서 사이버 전문장교를 양성하는 건 전 세계 최초의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졸업생들은 다음 달부터 7주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올 7월 소위로 임관한다. 장교의 의무복무 기간으로는 가장 긴 7년 동안 군생활을 해야 한다. 올해 국방과학연구소(ADD) 산하에 설립되는 사이버기술연구센터에서 유사시 북한의 사이버망을 무력화하는 ‘사이버 무기’를 개발하는 연구인력으로도 활약할 예정이다.

임 교수는 “핵무기 보유를 통해 핵 억제력을 갖는 것처럼 때론 북한의 전산시스템도 붕괴시킬 수 있는 사이버 억제력을 갖춰야 사이버 테러를 막을 수 있다”며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사이버 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들 졸업생이 핵심 전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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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 학생들이 교내 워룸(War Room)에서 모의해킹 프로그램을 시연하고 있다. 이곳에선 공격과 수비조로 나뉘어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의해킹 실습을 한다. 학과 보안 규정에 따라 학생 얼굴은 공개하지 않았다. [사진 오상민 기자]

 ◆‘워룸’서 실전 방불케 하는 모의해킹훈련=졸업 후 군사훈련만을 거쳐 바로 사이버 전문장교로 배치되는 만큼 교육 과정 또한 실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실습실은 ‘워룸(War Room·작전지휘실)’으로 불린다. 기자가 워룸에 들어서자 그룹별로 배치된 수십 대의 컴퓨터와 벽면을 채운 대형 TV가 눈에 띄었다.

 “수업 때 일부를 공격-수비조로 나누어 한쪽은 상대방의 서버를 해킹하고, 반대쪽에선 서버의 취약점을 방어합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벽면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이를 관전하고 평가합니다.”(홍석희 사이버국방학과 교수)

 학과장인 홍 교수는 “워룸을 만들기 위해 데이터베이스 구축 비용 6억원을 포함해 총 10억원을 투입했다”고 설명했다. 실습 과정에선 북한 내부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까지 활용한다고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 학생들은 ‘화이트 해커(White Hacker·악의적인 해킹을 방어해 보안시스템을 지키는 전문가)’로 거듭난다. 졸업생 김모(23)씨는 지난해 과내 해킹 동아리 ‘CYKOR’의 팀원으로 해커들의 월드컵으로 불리는 ‘데프콘(DEFCON) 23 CTF’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팀이 이 대회에서 우승한 건 처음이다.

김씨는 “입학 전만 해도 해킹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며 “다양한 사이버전 시나리오를 가정해 모의해킹훈련을 하면서 실력을 키웠다”고 말했다.

 단순히 해커만 양성하는 건 아니다. 암호학·사이버전쟁법·군사학 등의 수업을 통해 암호해독가, 사이버정책 전문가도 길러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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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출신으로 사이버국방학과에 입학한 이모(23)씨는 “사이버 안보 분야에서도 해킹뿐 아니라 심리전까지 아우를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말에 입학을 결심했다”며 “사이버 관련 법률이나 정책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실전을 염두에 둔 만큼 교육 과정은 빡빡하게 진행된다. 졸업을 위해 이수해야 할 전공 학점이 일반 공과대학의 두 배에 가까운 108학점에 달한다. 한 학생은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해 하루 7~8시간씩 전공 수업을 듣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대신 혜택은 확실하다. 4년간 등록금이 전액 면제되고 생활비로 한 달에 50만원을 준다. 등록금은 국방부가, 생활비는 학교가 부담한다. 교수진도 암호학자, 해커, 군 장성 출신 등 최고 전문가들로 꾸려졌다. 그래서인지 학과의 입학 커트라인은 이공계열 최상위권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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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10세부터 수학 영재 해커로 육성=국방부가 사이버 전문장교를 육성하는 건 북한의 사이버 테러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실제 북한은 2009년 정찰총국 산하에 사이버전 지도국(제121국)을 설립한 이후로 사이버 전력을 급격히 키우고 있다. 현재 해커 1200명을 포함해 6000여 명의 사이버전 인력을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달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 청와대를 사칭한 악성코드가 내장된 e메일이 대량 유포된 것도 북한 해커들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특히 북한은 체계적인 해커 양성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학 영재를 선발해 만 10세 때부터 매년 500시간이 넘는 컴퓨터 집중 교육을 한 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지휘자동화대학 등으로 보내 사이버 전사로 육성한다.

반면 한국의 사이버 전력은 사이버사령부 인력을 포함해 1000명 수준에 불과하고 인재 양성 시스템도 걸음마 단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보사 여단장을 지낸 한희 서울미디어대학원 교수는 “사이버전은 프로그래밍을 이용한 해커의 창의력 싸움으로, 기술자가 아닌 ‘상상하는 군인’이 주체가 되는 전쟁”이라며 “사이버전 장교들이 경직된 군 문화 속에서 실험정신을 잃지 않도록 체계적인 육성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S BOX] 이스라엘, 상위 2% 고교생 50~60명 뽑아 사이버장교 양성

“LA와 샌프란시스코가 단숨에 어둠에 휩싸이고 미국 나스닥의 시장 거래 시스템이 공격당해 수백억 달러 가치의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된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가 지난달 공개한 사이버전 예상 시나리오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간 분쟁에 미국이 개입하자 중국이 미 본토에 사이버 공격을 감행한다는 내용이다. 총 한 방, 대포 한 발 없이도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빈사상태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경고였다.

현대전쟁에서 사이버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주요 강대국들은 사이버 전사 양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국은 사이버전 인력을 양성하는 데만 매년 수조원의 예산을 쓰고 있고, 올해 6000명 규모의 사이버 방어부대도 구축할 계획이다.

지난해 100명 규모의 사이버사령부를 신설한 일본은 올해 사령부 예산 2000억원 중 절반가량을 사이버 전사를 교육하는 데 배정했다.

이스라엘의 ‘탈피오트(Talpiot)’는 특히 세계 최고의 사이버 장교 양성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국방부는 매년 과학·수학 등에서 특출한 성적을 낸 상위 2%의 고교생 중에서 50~60명을 선발한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대학에서 과학학사학위(BSC)를 취득한 뒤 9년간 무기산업 연구개발(R&D) 분야에서 장교로 복무한다.

김형중 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 교수는 “탈피오트 출신들은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엔지니어로 인정받아 첨단 기업에 스카우트된다” 고 말했다.

글=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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