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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영의 호모디지쿠스] 연락하지만 만난 적 없고 헤어졌지만 늘 연락하는 카톡시대 묘한 인간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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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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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강일구]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가 아무 답변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기분을 알 것이다. 더구나 보낸 메시지를 상대방이 읽어 ‘카카오톡 저주 숫자’라는 ‘1’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데도 답이 없는 경우라면 말이다. “날씨가 춥네. 잘 지내지?” 같은 인사에 불과한 데도 답변이 없을 땐 더욱 기분이 나빠진다. 이보다 더 서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응”이라고 한 글자 답만 오는 경우다.

 인사를 건네면 인사가 와야 하고, 호의를 베풀면 호의가 돌아와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세상이 각박하다 보니 가는 것만 있고 오는 것이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이 더럽다” “웃는 낯에 침 뱉는 놈도 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인터넷 명언으로 자주 쓰인다.

사실 썩 좋은 일은 아니다. 이미 사회가 아주 삭막해졌거나, 아니면 우리가 관용을 부릴 여유조차 없어졌다는 것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호의는 서로 자주 계속 만나야 하는 사람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까지 계속되기는 어렵다.

노약자들을 위한 마음으로 양보했던 버스와 지하철의 자리는 언제부턴가 배타적 ‘지정석’이 됐다. 인터넷에는 가끔 그 자리에 앉았다가 어떤 노인에게 혼난 임신부 이야기가 화제로 올라오곤 한다. 호의가 권리가 된 사례다. 반대로 무례한 젊은이들에게 조언했다가 놀림을 당한 노인들의 사례도 종종 있다.

 세상이 이미 그런 세상이 되었으니 그냥 체념하고 기대하지 말고 살자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처세술이 됐다. 인터넷에 떠도는 ‘40대에 하지 말아야 할 것 몇 가지’ ‘50대에 하지 말아야 할 것 몇 가지’ 같은 글에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대접받으려 하지 마라”다. 아예 “인간 문제의 대부분은 대접받으려 하는 데서 생긴다”며 하심(下心)을 격언으로 삼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은 복잡하게 인연 만들지 않고 혼자 사는 세상처럼 느껴진다. 이미 네 가구 중 한 가구는 혼자 사는 나 홀로 세대고, ‘혼밥’ ‘혼술’이 낯설지가 않다. ‘고독’에 대한 책이 인기를 끌고 있고 TV에서는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법정 스님도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 있어도 인터넷만 연결돼 있으면 친구들과 게임을 할 것이다. 영화 ‘마션’이 그렇다. 화성에 떨어져 있어도 지구와 연락만 되면 어떻게든 살아간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중요한 것이지 굳이 같은 장소에 함께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할 때만 만날 수 있는 사이는 그 사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기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다.

 예전 세대는 ‘공존의 이유’를 노래하며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를 슬퍼했다.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 눈물, 콧물 뿌리며 추억에 젖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모든 동창이 언제든지 손가락만 까딱하면 나타난다. 매일같이 자신에게나 예쁘게 보일 아이들 사진, 여행지 사진을 귀찮게 올려댄다. 만나도 만난 것 같지 않고 헤어져도 헤어진 것 같지 않은 애매한 시대가 됐다.

 인류학자 로빈 던바 교수는 뇌의 신피질과 사회 구성체의 크기를 비교해 인간이 인간관계를 맺기 적절한 규모는 150명이라는 숫자를 발표한 적이 있다. 작지만 강력한 연대(strong tie)다. 하지만 현대인은 주머니 속 휴대전화에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 엄청나게 크지만 느슨한 연대(weak tie)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칡넝쿨처럼 너무 얽혀도 문제지만 깃털처럼 너무 가벼워도 문제인 인간관계. 자주 연락하지만 만난 적 없고 헤어졌지만 늘 연락이 되는 이 묘한 인터넷 시대. 혼자 살지만 수많은 인연을 매일 스쳐가는 이런 시대에 마음 상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임문영 인터넷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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