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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찍는 사진사…500여 장애인 가족 사진 무료로 찍어

중앙일보

입력

"정말 행복한 표정 아닌가요. 비장애인들도 이처럼 밝게 웃진 못해요."

11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바라봄 사진관. 나종민(53) 대표가 2012년에 찍은 두 모자의 사진을 보여줬다. 소아마비 환자인 60대 아들과 80대 노모의 가족사진이다. 액자 속에선 곱게 치장한 어머니와 한껏 멋을 부린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모자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매달 80만원씩 받는데 몇 십년 째 기부를 하고 있답니다. 환한 표정의 이유가 여기 있던 거죠."

나 대표는 국내 첫 장애인 가족사진 전문가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500여 장애인 가족의 사진을 무료로 찍었다. "제 돈 주고 찍으려 해도 일반 사진관은 여전히 장애인에게 문턱이 높습니다. 카메라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야 되기 때문이죠." 장애인 가족사진을 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폐아의 경우 스튜디오에 아예 서질 않으려 한다. 조명을 낯설어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꼭 잠그기도 한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어느새 부모들의 표정도 일그러진다.

그래서 장애인 가족사진엔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하다. 바로 인내심이다. "촬영을 한다기보다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몇 백번씩 셔터를 눌러야 하죠." 그가 장애인 가족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11년 장애인 체육대회 봉사를 갔는데 한 어머니가 오더니 일반 사진관에선 찍기 힘들다며 가족사진을 부탁했다. 이 일을 계기로 바라봄 사진관을 열었다.

지난 가을에는 10대인 아들과 암 판정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았다. 어머니와 사별후 청소년시설에 맡겨진 아들과 막일 등으로 힘겹게 살아온 아버지의 표정은 밝을 수 없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것만 여러번. 이를 악물고 두 부자에게 말을 건네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한 달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스튜디오에서 찍어뒀던 독사진은 영정에 올랐다.

"사진엔 누구나 자신만이 주인공인 스토리가 담겨 있어요. 소외받고 어려운 이들에게 그런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게 제 일입니다." 사진을 찍고 돌아간 가족들은 그에게 "고맙다" "행복하다"와 같은 문자를 줄지어 보낸다. 500원짜리 동전이 가득한 저금통을 주며 다른 가족사진을 찍는데 보태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최근 그는 '1+1'으로 비장애인 가족사진도 찍기 시작했다. 다른 사진관보다 저렴하게 가족사진을 찍고 장애인 등 소외계층에게 가족사진을 선물할 수 있다. 나 대표는 "'1+1'으로 비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이 연을 맺고 친구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2014년부터는 필리핀과 캄보디아 등에서 사진봉사도 시작했다. 현지 저소득층들의 가족사진을 찍어 액자로 담아 준다.
지난해부터는 매달 한 가족을 선정해 '아름다운 하루'를 선물하기 시작했다. 나 대표의 뜻에 공감한 인근 가게 주인들과 함께 헤어숍에서 멋지게 치장하고 사진을 찍은 후 고급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의 손 끝에서 시작된 선행은 주변으로 퍼져 200여명의 정기 후원자도 생겼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그 역시 보통 샐러리맨이었다. 80년대 대학을 다니고 외국계 IT기업에서 20여년간 근무하며 한국 지사장까지 지냈다. 억대 연봉을 받으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그런데 50대 이후의 삶의 목표가 막막했다. "은퇴 후 먹고 살 만큼 준비는 해놨지만 무엇을 위해 살지 정해져 있지 않았죠. 그렇게 고민하다 '소명'처럼 받아들인 것이 장애인 가족사진이었습니다." 나 대표는 "인생의 즐거움은 물질을 얻는데 있는 게 아니다"며 "삶에 만족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때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지금 무엇보다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버지를 본 받은 아들이다. 장래 교사가 꿈인 아들은 몇 해전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저소득층 학생들을 모아 무료 과외를 하다 얼마전 입대했다. "나눔이 아들에게까지 전염됐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은 없죠. 아들에게 돈이 아니라 행복의 의미를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어 매우 행복합니다."

사진으로 장애인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는 나 대표처럼 카메라 렌즈에 버려진 고양이를 담아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도 있다. 필름카메라인 ‘로모(LOMO)’만으로 사진을 찍는 안욱환(42) 씨다. 이른바 '길냥이(길고양이)' 전문 사진작가다.

"'길냥이'를 볼 때마다 인간의 이기심과 무책임함에 미안함을 느껴요. 고양이를 길들인 것도, 또 버린 것도 인간이기 때문에 생명을 상품처럼 여기는 인간의 잘못이 큰 거죠." 안씨는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개나 고양이를 기른다"며 "동물을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장난감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길냥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경기도 용인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길고양이 집을 짓던 50대 여성이 초등학생이 던진 벽돌에 맞아 사망한 ‘캣맘 사건’ 이후 길고양이는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안씨는 2006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자신의 반려동물이던 고양이가 가족들에 의해 버림받게 된 사건을 계기로 고양이 사진을 찍어 왔다. 주인없이 길거리를 헤매는 '길냥이'를 볼 때마다 미안함을 느껴왔고 그 감정을 렌즈에 담았다. 2013년부터는 매해 '길냥이' 사진전을 열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안씨는 "인간과 고양이는 결국 도심 생태계 내에서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길냥이' 사진을 찍으며 굳이 그가 필름 카메라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과정도 번거롭고 불편한 데 말이다. "'필카'는 한 롤당 24컷만 찍을 수 있어요. 수십장의 사진을 찍어 마음에 드는 한 장을 고르는 '디카'용 찍기가 불가능합니다. '필카'가 순간순간 정성을 다해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죠." 안씨는 “필카를 사용하면 정말 마음을 움직이는 장면만을 카메라에 담게 된다"며 "피사체를 앵글에 담아 셔터를 누르는 과정이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필카'의 매력으로 안씨는 '기다림'을 꼽았다. 사진을 찍고 현상소에 맡기면 며칠이 지나야 인화 사진을 받아볼 수 있다. 안씨는 “기다린 시간이 길수록 사진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내가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더욱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안씨는 다시 '길냥이'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필카'처럼 매순간 진심을 담아 다른 생명을 대한다면 버려지는 반려동물이 없을 거예요."

윤석만·정진우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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