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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화장지·비누 계속 사라지자…정부 "비용 댈 테니 가져가게 놔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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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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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발표한 다음날인 11일 오전 개성공단에서 출발한 공단관계자 차량이 남북출입국사무소로 들어오는 모습(왼쪽)은 2013년 4월 개성공단 가동 중단 당시 철수 차량들이 입경을 기다리는 장면(오른쪽)과 겹쳐있다. [사진 중앙포토]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었다. 개성공단 폐쇄까지 이어지면서 당분간 해법을 찾기 힘들 것이란 비관적 전망까지 나온다.

[뉴스 속으로] 남북 심리전 어떻게 변해 왔나

평양의 입인 선전 매체들도 거칠어졌다. 11일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정부의 공단 폐쇄 방침에 불만을 토로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맹비난했다.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 외에 비장의 무기로 맞대응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대북 심리전이다.

사실 남북 간은 곳곳에서 심리전을 벌여 왔다. 남북 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2004년 12월 가동 직후 개성공단에선 화장지와 비누 등이 없어지는 일이 잦았다. 남측 물품의 질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북한 근로자들이 하나둘 챙겨 갔기 때문이다.

처음 남한 기업주들은 이를 단속하려 했다. 하지만 정부는 “비용을 댈 테니 그냥 가져가게 놔두라”고 했다. 개성 주민들이 남한의 발전상을 스스로 깨닫는 게 더 유용하다는 심리전의 일종에서였다.

북한 근로자들에게 식사로 쌀밥에 고깃국을 제공하고 샤워를 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심리전 효과를 냈다. 한 입주기업 관계자는 “야윈 데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던 북한 근로자들이 2~3개월 지나면 몰라보게 좋아지곤 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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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북측 근로자들이 휴식 시간에 운동을 즐기는 모습. 개성공단은 큰 의미에서 북 주민을 대상으로 한 거대한 심리전 공간이기도 했다. [중앙포토]

공단 입주기업인에 따르면 북한 근로자가 “남한에 가서 이런 회사에서 계속 일했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전단 한 장 대북 방송 한마디 없었지만 북한 주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생생한 심리전의 현장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남한 문물에 물들까 우려하다 고육지책(苦肉之策)을 쓰기도 했다. 간식으로 제공된 초코파이가 인기를 끌자 전전긍긍하다 공급 중단을 요청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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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격적인 심리전은 역시 대북 확성기 방송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대북 확성기의 위력은 지난해 8월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고조된 긴장 국면에서 위력을 입증했다. 정부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자 북한은 확성기 방송 중단에 사활을 걸었고, 결국 ‘8·25 합의’가 나왔다.

군 관계자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도발이 있은 7일 이후 최전방 지역에 이동식 확성기를 추가 배치했고 하루 6시간이던 대북 확성기 방송 시간도 확대했다”고 말했다.

반면 방송 출력이나 도달 거리에서 절대 열세인 북한은 대남 전단 살포에 치중하고 있다. 서울 도심까지 떨어진 것으로 확인됐지만 큰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심리전 수단에 확성기만 위력이 있는 게 아니다. 라디오나 대북전단 같은 고전적 방식도 여전히 먹히고 있다. 북한 사회의 폐쇄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북 라디오 방송을 들어본 경험이 있는 탈북자들에 따르면 폐쇄적인 북한에서 외부 세계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소식은 말 그대로 그들에게 ‘신세계’였다.

노동당 간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 간부이던 남편이 몰래 대북 라디오를 듣길래 처음엔 ‘반동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방송에 나온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 얘기를 접하고는 남편과의 동반 탈북을 결심했다”고 탈북자 이성순(가명)씨는 말했다.

사실 심리전을 먼저 시작한 쪽은 북한이었다. 1960년대 초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판단한 북한은 “사회주의 낙원으로 오라”고 확성기를 틀었으나 전세가 역전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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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다음날인 지난 9일 오두산전망대서 바라본 북한 초소. 앞에 대남확성기가 있다. 사진 강정현 기자

◆‘심야의 신세계’ 대북 라디오 방송 = 94년 사선을 넘어온 탈북자 김승철씨는 2007년 말부터 대북 라디오 방송 ‘북한개혁방송’을 시작했다. “라디오를 통해 외부 세계의 소식이 계속 전파되면 북한 내부에서 체제 변화의 에너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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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방송 수신에 쓰인 라디오.

실제로 2002년 탈북한 박용현(가명)씨는 대북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남한행을 결심했다. 박씨는 “북한에서는 월남한 탈북자들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 등 최악의 환경에서 고생스럽게 산다고 선전하는데, 대북 라디오에 출연한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전기와 물을 펑펑 쓰고 있다고 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북한개혁방송의 설문조사에서 대북 라디오 방송의 효과를 엿볼 수 있다. 방송이 2008~2014년 탈북한 주민 150명을 상대로 지난해 말까지 벌인 ‘북한 주민 대북 라디오 청취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에 있을 당시 매일 대북 라디오를 들었다’는 탈북자가 7%였다.

▶‘며칠에 한 번 들었다’ 6% ▶‘일주일에 한 번 들었다’ 7% ▶‘한 달에 두세 번 들었다’ 22%였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라디오를 청취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가 42%로 절반에 가까웠다. ‘대북 라디오를 들은 적 없다’는 탈북자는 2%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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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청취율이 높은 시간은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였다. 가장 많이 들었던 프로그램은 ▶뉴스(24%) ▶노래(22%) ▶탈북자 소식(18%) ▶연속극(14%) ▶시사해설(9%)의 순이었다. 2002년 탈북한 이성순(가명)씨는 “북한은 외부 사상 유입 통제를 이유로 라디오를 못 듣게 해서 심야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듣는 주민이 많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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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전의 '고전' 대북 전단 = 2010년 탈북한 안주연(가명)씨는 휴전선 일대에서 인민군으로 근무했던 오빠를 통해 ‘10분이면 월남이 충분합니다’고 적힌 대북 전단을 본 경험이 있다. 안씨는 “남한에서 날려 보내는 대북 전단은 ‘고난의 행군’ 등으로 지친 북한 주민들에게 한 가닥 삶의 등불이자 한국 사회에 대한 동경의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80년대 남측에서 날려 보낸 한 대북 전단에는 여배우 강수연씨 사진과 함께 ‘강수연이 영화 한 편에 출연해서 받는 돈은 한 달에 80원 받는 북한 근로자 3300명이 받는 월급과 맞먹는 엄청난 돈이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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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로는 대북 전단과 함께 치약이나 칫솔, 화장지, 스타킹, 스카프 등 생활필수품을 보내는 경우도 잦아졌다.

대북 전단에 대한 북한 당국의 대응 수위도 갈수록 높아졌다. 그만큼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남측이 살포한 전단은 허위라고 교육하면서 “보지 말고 찢어 버리라”고 지시했다.

70년대에는 “습득 시 보위부에 신고하라”고 다소 수위를 올렸다. 80년대 이후에는 “전단 발견 시 아예 보거나 줍지도 말고 즉각 안전부나 보위부에 신고하라”고 주민들에게 교육시켰다고 한다.

◆ 신형 심리전 무기 ‘스텔스 USB’= 최근엔 생활필수품이나 USB(컴퓨터 저장 매체) 살포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심리전 수단이 다양화·고도화되고 있다.

지난해 8월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는 대북 전단 20만 장과 함께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암살하는 내용을 다룬 코미디 영화 ‘더 인터뷰’가 담긴 USB 500개를 대형 풍선에 담아 북쪽으로 날려 보냈다.

북한에 보내는 USB는 겉으로 보기엔 저장 파일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파일이 들어 있어 ‘스텔스(잠행) USB’라고도 불린다. 민간단체인 ‘자유북한방송’은 “지난해 6월 신의주 등 북·중 국경지역에 빨간색으로 된 남한 USB가 곳곳에서 발견돼 북한 당국에 비상이 걸린 적도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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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간단체가 대북 전단을 실은 풍선을 북쪽을 향해 날리는 모습, 남한 대중가요나 영화 등 파일을 담은 USB(컴퓨터 저장 매체).

북한 당국에 회수된 USB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일가에 대한 내용, 남한의 발전상 등이 상세히 담겨 있었다고 한다.

탈북자 이성엽(가명)씨는 “우상화에만 주력하는 북한 방송은 재미가 없는데 한국 영화는 소재가 다양하고 만화처럼 재미있어 방법만 있으면 보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S BOX] 개성공단 북 근로자 채용 때 사상 검증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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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이 2013년 4월 3일 북한의 일방적인 통행 제한 조치로 가동 중단된지 160여 일 만에 재가동된 뒤 북한 개성시 봉동리 개성공단 J&J에서 근로자들이 제품을 생산하는 모습. [사진 중앙포토]

‘개성공단 셧다운’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공단 내 북한 근로자는 5만4763명(지난해 11월 말 기준)이다.

12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그동안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공단 근로자를 뽑았다. 업무상 한국인과의 접촉이 잦을 수밖에 없어 사전 사상검증은 필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단 근로자로 최종 선발되면 ‘로또’에 당첨된 듯 기뻐하는 주민이 많았다.

북한 근로자에게는 1명당 월급으로 약 130달러가 지급됐다. 미국의 마커스 놀런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부소장은 2014년 3월 한 보고서에서 “북한 당국이 월급 130달러 중 약 40%를 사회보장, 출퇴근 혜택 등 명목으로 떼어 가고, 나머지는 북한 화폐로 지급하는데 환율을 제멋대로 부풀려 실제 근로자들이 손에 쥐는 임금은 2달러 가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우리 정부와 국책연구기관은 북한 당국은 130달러 중 50달러 정도를 떼고, 나머지 80달러 정도를 북한의 공식 환율인 달러당 약 100원으로 계산해 8000원 정도를 주민들에게 지급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북한개혁방송 김승철 대표는 “일부 북한 근로자들은 공단 내 제품이나 원자재 등을 빼돌려 밀거래 시장에서 몰래 팔기도 했다”며 “그런 ‘부업’까지 이제 없어졌으니 근로자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구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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