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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보다 더 불편한 강제 스킨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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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31면

‘막장 드라마에 대한 법적 제재는 정당하다.’ 법원은 25일 방송통신위원회 손을 들어줬다. ‘압구정 백야’라는 드라마다. 필자는 그 드라마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이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의 의붓아들과 결혼해 며느리가 되는 내용이라고 한다. 결혼을 반대한 어머니는 딸에게 “버러지 같은 게…”라고 욕을 하며 컵에 담긴 물을 뿌리고 구타했고, 딸은 “버러지가 버러지 낳았겠지”라며 대들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설정과 대사들이 청소년 보호, 건전한 가정생활을 해쳤다는 것이다.


직접 보지도 않은 그 드라마를 변호할 마음도, 비난할 생각도 없다. 다만 상황 설정만으로 그런 비난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설이나 희곡은 부조리한 상황을 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만 봐도 그렇다. 햄릿의 숙부는 형을 죽이고, 형수와 결혼한다. 햄릿은 연인의 아버지와 오빠를 죽이고, 연인이 자살하게 만든다. 숙부를 죽여 복수한다. 리어왕은 가식적인 두 딸에게 나라를 상속하고, 정직한 막내딸은 추방한다. 자매 간에 독살하고, 자살하고, 전쟁하고… 오셀로는 아내를 죽이고, 맥베스는 운명의 신 말을 듣고 왕과 경쟁자를 죽인다. 귀신과 점술과 음모와 살인, 근친 결혼… 어찌 보면 막장이라고 할만한 설정들이다.


불쾌한 것은 설정이 아니다. 극단적인 상황 설정 속에서도 등장인물에 공감해 절망과 슬픔을 느끼고, 고통 속에 번민하며 정화의 기회를 갖는 게 문학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윤리는 절대적인 경험을 통해 좀 더 명징하게 볼 수 있다. ‘압구정 백야’를 변호하는 측에서 권선징악적 결말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런 생각에 기대려는 의도였으리라. (그렇게 가져다 붙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정작 불편한 것은 잘못된 가치관과 행동을 미화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살인도 있고, 부조리, 부도덕도 널려 있다. 선이 반드시 악을 이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전개하며 작가는 분명히 자신의 판단을 전달한다. 자칫 잘못된 가치관이, 행동이 미화돼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잡을까 걱정이다.


드라마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진짜 우리 이웃보다 드라마가 만든 세상, 드라마 속 이웃들과 같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져보면 내가 직접 경험한 건 별로 없다. 이란 제재가 해제됐다는 건 신문에서 읽고, 방송에서 들은 것이다. 가로수길, 홍대 앞 골목 이야기는 잡지에서, TV에서 본 것이다.


짐 캐리가 열연한 트루먼은 30년 간 세트장이 지구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영화 ‘트루먼쇼’(1998)에서 아버지나 친구, 심지어 아내까지 배우였다. 영화 ‘아일랜드’(2005)에서도 인조인간들은 복제공장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책과 신문, 특히 드라마와 영화가 만들어놓은 세트장에 살고 있는 셈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드라마를 감시하고, 제재하는 것도 이런 걱정 때문이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그 세계에서는 성추행이 남자다운 행동이다. 멋진 남자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키스한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한다. 그런 남자의 행동에 싫다고 화를 내던 여자도 혼자 남게 되면 그 장면을 떠올리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여자의 내숭이라고 믿게 만든다.


남자가 힘으로 밀어붙이고, 강제로 손목을 잡아 끌고 가는 것을 ‘남자다움’으로 묘사한다. 멋진 배경 음악까지 깔아주면서 아름답게 포장한다. 심지어 성폭행도 ‘죽도록 사랑해서’ 저지른 행동으로 그리기까지 한다. 여자를 괴롭히는 ‘스토킹’을 사랑을 쟁취하려면 필요한 노력쯤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젊은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아나. 백지 상태의 젊은이들이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남자답게 보이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분명히 거절해도 내숭이라 여기고 열심히 들이대야 여자가 좋아할 거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화가 난다고 물을 끼얹는 장면도 단순한 감정 표현 정도로 처리된다. 분명히 폭력인데 말이다. 잘 생긴 부잣집 아들이면 웬만한 행동이 다 용납된다. 그런 젊은이는 가난한 신데렐라에게 거칠게 애정 표현을 해도 멋진 프로포즈로 간주된다. 못생긴 남자는 진심을 담아도 웃음거리다. 용모에 따른 모욕, 폭력은 오락이나 개그프로에서 더 심각하다.


왜 이렇게 남성 위주의 편견덩어리인가.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장면이 나온 드라마를 찾아봤다. 대부분 여성작가다. 그분들은 그런 ‘남자다운 성폭행과 스토킹’에 정말 공감하는 것일까.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 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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