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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혹한·폭설…가족과 3주째 생이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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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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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전북 김제시 용지면 검문소에서 공무원들이 차량에 방역소독을 하고 있다. 구제역이 발생한 김제·고창에 검문소 40여 개가 설치돼 24시간 가동 중이다. [김제=프리랜서 오종찬]

24일 오전 6시 전북 김제시 용지면 용수리. 농민 강재혁(41)씨는 눈을 뜨자마자 주먹 같은 눈발을 뚫고 돼지 축사로 향했다. 밤새 30㎝가 쌓인 눈은 장화 키를 훌쩍 넘을 정도였다. 수은주는 영하 15도까지 떨어졌다.

새벽 6시부터 축사 점검
눈 치우며 구석구석 소독
장갑 두 겹 껴도 손이 꽁꽁
40여 개 방역 검문소엔
경찰·군인 등 24시간 감시

 강씨는 돼지 20~30마리씩 모아 놓은 ‘돈방’을 돌면서 한 마리씩 점검했다. 구제역 증상(발톱이나 콧잔등에 물집이 생김)이 있는 돼지는 없는지, 힘없이 늘어진 놈은 없는지 등 자식 돌보듯 세심하게 체크했다. 평소 1시간 걸리던 점검이 3시간이나 걸렸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고 제설작업에 뛰어들었다. 추위에도 얼굴에 구슬땀이 흘렀다. 축사 붕괴 우려에 지붕 위 눈도 털어냈다. 눈을 웬만큼 치웠다 싶으면 금방 소복하게 쌓여 애를 먹었다. 눈 치우는 데만 한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점심식사 후에는 농장 소독을 시작했다. 요즘 가장 공을 들이는 작업이다. 100여 개의 방을 돌면서 고압 분무기로 구석구석 소독약을 뿌렸다. 혹시라도 구제역 바이러스가 남아 있을까 봐 돈사의 안팎·지붕 위까지 꼼꼼하게 약을 살포했다. 장갑을 두 겹으로 꼈지만 손이 얼어 20~30분마다 실내에 들어가 녹였다.

 강씨는 “애지중지 자식처럼 키운 돼지들이 구제역에 감염되지 않도록 매일 철통 같은 방역을 하고 있다” 며 “갑작스럽게 폭설·강추위까지 몰아쳐 정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올 들어 처음이자 청정지역 전북에 사상 첫 구제역이 발생(11일)한 지 2주가 지났다. 농민들은 구제역 방역과 강추위·폭설 등 3중고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특히 추울수록 구제역 병균이 기승을 부리는 것으로 알려져 농민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다.

 김제시 용지면의 한 농가에서 구제역이 검출돼 돼지 670마리를 긴급 살처분했다. 이틀 뒤인 13일에는 돼지 6700여 마리를 키우는 고창군 무장면의 양돈장에서 구제역이 검출됐다.

 이후 축산 농민들은 구제역 차단을 위해 스스로 농장 문을 걸어 잠갔다.

 가족·친구들과의 생이별이 3주째 접어들고 있다. 농장은 사료 공급과 분뇨 수거 차량에만 문을 열어준다. 이들 차량도 방역 후 소독필증을 발급받아야만 통행이 가능하다.

 돼지 2000여 마리를 키우는 강재혁씨는 지난 11일부터 직원 2명과 함께 농장에서 칩거생활을 하고 있다. 김제 시내에서 생활하는 부인과 아들·딸은 “보고 싶어요” “구제역 꼭 이겨낼 거예요” 등 응원 문자를 보낸다.

 백신접종도 돼지들과 밀고 당기는 씨름을 해야 한다. 돼지 700마리를 키우는 김상철(52·고창군 공음면)씨는 “100㎏ 돼지에 받쳐 오물을 뒤집어 쓰기도 하고 넘어져 다쳐도 구제역이 끝날 때까지는 병원 갈 엄두를 못 낸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다가오는 설 명절을 포기했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에게는 “고향에 올 생각 말라”고 통보했다.

 김제·고창 지역 40여 개의 방역 검문소에는 지자체 공무원과 경찰·군인 등이 3인 1조로 8시간씩 근무를 서면서 차량의 방역을 관리·점검한다. 강승구 전북도 농축수산국장은 “구제역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전북 지역 돼지의 다른 시·도 반출 제한을 29일까지 1주 연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주=장대석 기자
dsjang@joongang.co.kr

◆구제역=돼지·소·양 등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지는 동물(우제류)에서 발생하는 가축 전염병. 치사율은 70~80%. 사람에게 감염되는 인수공통전염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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