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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개발과 무관한 거래 뒤진 건 다른 목적 때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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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5 면

이명박 전 대통령(왼쪽)이 22일 경주에서 열린 극동포럼 초청 특강을 마치고 나오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검찰의 계좌조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경주=프리랜서 공정식

검찰이 지난해 5~6월 은행 계좌를 조회한 이명박(MB) 정부 고위급 인사가 50명을 넘어선 사실이 확인되면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MB 측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면서다. 당초 이 전 대통령은 첫 보고를 받은 뒤 “전 정부에서 장관과 청와대 수석을 지냈다는 이유로 고통을 받아선 안 된다. 하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고 잘 알아보고 대처하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검찰이 계좌조회 사실 자체를 부인하자 참모 회의를 다시 소집한 뒤 “검찰의 명백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공식 논평을 내도록 했다. 이 전 대통령 본인도 지난 22일 퇴임 후 첫 외부 강연에서 ‘검찰이 계좌를 뒤져 이명박 대통령 기념재단을 본격적으로 출범시키지 못했다’는 뜻을 나타냈다.


검찰에 대한 이 전 대통령 측의 불만은 계좌조회 논란 훨씬 전부터 쌓여왔다.

특히 지난해 3월 이완구 당시 국무총리가 대국민담화를 통해 ‘부정부패 척결’을 선언한 뒤 벌어진 일련의 검찰 수사가 MB 측을 겨냥한 표적 수사라는 인식이 강하다. 포스코 수사가 대표적 사례다. 검찰은 지난해 3월 포스코건설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8개월 동안 포스코 비리 의혹을 수사했다. 결과는 사건의 핵심인 MB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에 대한 불구속 기소로 그쳤다. MB 측 관계자는 “매출이 얼마 안 되는 소규모 광고회사까지 모두 다 뒤졌다”며 “멀쩡한 기업인 포스코가 적자를 내고 포항의 경제도 완전히 죽였다”고 토로했다.


금융계좌 조회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자원개발비리 사건도 그중 하나다.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은 2009년 캐나다 석유개발회사인 하베스트를 인수하면서 하베스트의 자회사인 정유회사 날(NARL)을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들여 석유공사에 손실을 보게 한 혐의(배임)로 지난해 7월 구속기소됐다.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의 아들 형찬씨는 ‘배임의 공범’으로 참여연대 등으로부터 고발됐다. 형찬씨는 당시 인수 주관사인 메릴린치투자증권의 지점장이었다. 메릴린치도 고액의 수수료를 받은 혐의(사기)로 함께 고발됐다. 하지만 결국 김씨와 메릴린치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강 전 사장도 지난 8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형찬씨의 아버지인 김 전 기획관과 금전 거래를 한 MB 측 인사들의 계좌를 열어봤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지난 18일 검찰 관계자와 기자들 사이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왜 계좌를 들여다봤나.“김형찬씨의 계좌를 추적했는데 아버지인 김 전 기획관의 계좌도 연결자금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봤다. 그 과정에서 김 전 기획관과 거래가 있었던 사람들의 계좌도 열어보게 된 것이다.”


-계좌를 열었지만 혐의가 없어 추가 수사를 안 했다는 뜻인가.“그분들(MB 측 인사들) 상대로 혐의점을 둔 상황은 아니었다.”


-다 고위직인데 알고 열어봤나.“전혀 아니다.”


-공교롭게 그랬던 것인가.“당시 여러 계좌추적을 진행했는데 그분들이 섞여 있던 것이다. 골라서 본 게 아니다.”


MB계가 표적이 아니었고 수사를 위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다른 검찰 관계자도 “계좌추적이란 돈의 흐름을 따라 진행하는 수사 방법”이라며 “특정 집단을 표적으로 놓고 그들의 계좌를 마음대로 열어보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당초 계좌조회 사실을 부인한 것에 대해선 “당시 사건 담당 검사가 해외 체류 중이어서 뒤늦게 파악됐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MB 측에선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수사를 핑계로 이명박 대통령 기념재단의 자금 출처를 조사하거나 또 다른 비리 의혹을 뒤지는 것이 검찰의 의도였다고 보고 있어서다. MB 측 관계자는 “계좌조회를 통보받은 인사 대부분은 이명박 재단에 자발적으로 출연금을 낸 사람들이다. 재단의 ‘총무’ 역할을 맡고 있는 김 전 기획관의 계좌로 출연금을 일단 모았다가 재단으로 이전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몇 사람 계좌만 조사하면 자원개발과 무관한 거래임을 곧바로 알았을 텐데 고위직뿐 아니라 실무 행정관들까지 이 잡듯 뒤진 걸 보면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지난해 김 전 기획관에 대한 포괄 계좌추적 영장을 발부받은 뒤 김 전 기획관의 계좌에 100만원 이상을 보낸 금융거래를 광범위하게 뒤졌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거듭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논란은 검찰이 발부받았다는 포괄 계좌추적 영장과 과잉 수사 여부로 옮겨 붙고 있다. 이는 특정인과 관련된 모든 계좌를 뒤질 수 있는 ‘포괄적 압수수색 영장’을 뜻한다. 영장에 특정한 계좌번호 대신 특정인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 넣고 청구하는 형식이다. 영장이 청구된 사람의 계좌 앞뒤로 금융거래가 이어진 연결계좌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검찰 관계자는 “법원이 포괄 계좌추적 영장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니 발부해준 것 아니냐. 전혀 문제 될 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수사기관은 필요한 만큼만 최소한의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수사의 상당성’ 원칙을 지켜야 한다. ‘100만원 이상’이란 임의의 가이드라인을 정해놓고 그 이상의 금융거래 일체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이는 ‘금융거래 자료 추적은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한다’는 법무부 인권보호 수사 준칙과도 어긋난다.

한 네티즌이 은행으로부터 받았다며 인터넷에 올린 ‘금융거래정보 제공사실 통보서’.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나처럼 김 전 기획관에게 1000만원을 보냈지만 조회당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특히 검찰 고위직 출신 중엔 친소관계에 따라 대상자를 고른 것 같다”고 주장했다.


◆ 금융거래 정보 등의 제공사실 통보서


MB 측 인사들이 받았다는 통보서는 국가 기관이 수사, 과세자료·조세탈루 조사, 국정조사 등의 용도로 본인 동의 없이 금융거래 내역을 조회한 뒤 사후에 금융기관이 이 사실을 당사자에게 공지하는 서면이다. 1997년 제정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에 의해 의무화됐다. 제공 후 열흘 이내 알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증거 인멸·증인 위협 등 공정한 사법절차를 방해할 우려가 명백한 경우 최대 6개월까지 통보를 늦출 수 있다.


이충형·추인영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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