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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노부부의 1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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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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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노사정 대타협이 혹한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었다. 구조조정 한파도 불고 있다. 최근 받아본 편지 한 장이 뇌리에 박힌다. 보낸 이는 권성원 차의과학대 석좌교수. ‘꽃보다 아름다운 친구’라는 제목을 달았다. 권 교수의 친구는 허천구 코삭 회장이다. 지난해 성탄절 직전 부인과 함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0억원을 기부해 뉴스를 탔다. 70대 노부부가 나란히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에 이름을 올렸다.

허 회장의 결정에 주변에선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권 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친구의 살림이 10억원을 내놓을 형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 있는 것 아니야. 혹시 죽음을 앞두고 선택한 것이야”라고 물었다. 허 회장의 답변이 먹먹했다.

 30여 년 전, 허 회장은 철강그룹 삼미의 기획조정실장이었다. 창업주가 별세하면서 회사가 도산 직전 상태가 됐다. 그는 구조조정에 나섰다. 회사 13개를 헤쳐 모아 4개로 줄였다. 직원 3000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고육지책이었지만 매일 매일이 지옥이었다”고 했다. 지난 연말 ‘사건’이 일어났다. 지하철을 타고 있던 허 회장 앞에 앉은 80대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 사장 아니쇼?” 허 회장은 옛 동료인가 싶었다. 그 다음의 말이 충격이었다. "20여 년 젊음을 바쳐 일하던 내 밥그릇을 당신이 빼앗아 갔거든!” 노인은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며 지하철 밖으로 사라졌다.

 허 회장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과할 틈도 없었다. 이후 해고된 직원들이 삿대질을 하는 악몽에 시달렸던 그는 “노년에 한숨짓는 분들에게 무언가 돌려주자”며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찾아갔다. 뜸을 들이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사연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허 회장에겐 깊은 슬픔이 있었다. 30년 전 기차 사고로 유치원생 고명딸을 잃었다. 회사를 떠나려 했지만 남아달라는 주변의 만류에 기획실 사장이 됐고, 그 과정에서 많은 직원을 해고하게 됐다.

 세상사는 이렇듯 두부 자르기처럼 간단하지 않다. 권 교수는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미꾸라지를 용의 나라로 둔갑시킨 꼰대들의 눈물겨운 희생을 이 시대 젊은이들이 알까요. 친구에게 뺨 맞을 각오로 실명을 밝힙니다.” 그건 꼰대의 푸념이 아니었다. 이 시대에 대한 말 걸기로 다가왔다. 노(勞)도 사(使)도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요즘을 살펴보게 한다. 허 회장의 10억원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서로 반 발짝의 ‘희생’밖에 길은 없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