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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대란 첫날···"비용 부담에 유치원 입학 포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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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서울 성북구 정릉동 A유치원. 수업이 시작된 뒤에도 유치원 입구에 있는 신발장엔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다.

애초 등록했던 원아 240여 명 중 26명이 개학 사흘째인 이날 나오지 않았다. 이종희(57) 원장은 "지난달 말부터 '누리과정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몰렸다. 비용 부담을 걱정한 학부모가 입학을 포기한 듯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A유치원은 이달분 누리과정 지원금을 받지 못한 서울·경기도 유치원 3076곳 중 한 곳이다. 유치원은 교육청에서 주는 누리과정 지원금에 학부모들에게 받은 원비를 보태 인건비·급식비 등을 충당한다. A유치원도 매달 20일께 받는 지원금 6000만원으로 보육교사·조리사·운전기사 등 30여 명의 월급을 지급해 왔다.

하지만 서울시의회가 관련 예산을 삭감하면서 이날 입금돼야 할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원장은 지난주 보육교사들에게 "아무래도 이번 달 월급은 늦어질 것 같다"며 양해를 구했다. 유치원 교사 최모(33)씨는 "당장 월급이 안 나오면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다"고 말했다.

경기도 유치원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날 오전 10시 경기도 수원시 영화동 B유치원 권모(56) 원장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학부모들에게 일일이 “끝까지 책임집니다. 부모님에게 추가 부담을 드리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

누리과정 문제가 불거진 이후 B유치원에선 12명이 입학을 취소했다. 권 원장은 “학부모들이 누리과정 지원비 29만원(방과후 포함)을 부담하기 쉽지 않다. 일단 원비를 올리는 대신 지인들에게 운영비를 빌려 충당하려 한다"고 말했다.

유치원들은 "지원금 지급이 어려우면 일단 은행 대출이라도 받겠다"며 교육청에 승인을 요청했지만 부정적인 답변만 들었다. 성남시 분당의 꿈나무유치원 황은심 원장은 “결국 교사들에게 ‘한 달만 참아달라’고 부탁했다. 부모들에게 손 벌리기도 어렵고 대출도 안 된다고 하니 어쩌란 말인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이날 서울시의회 앞에서는 유치원장·학부모 500여 명이 항의 집회를 벌였다. 이명희 한국유치원총연합회 서울지부장은 “정부·교육청·시의회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아 학부모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며 시의회에 예산을 편성할 것을 요구했다.

학부모 불만도 커지고 있다. 이날 서울 A유치원 입구에서 만난 정성희(31·여)씨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다니는 두 딸을 뒀다. 정씨는 "어린이집까지 지원금이 끊기면 자녀들 원비로 매달 50만~60만원이 더 든다. 직장을 관두고 집에서 키워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용인의 C유치원에 자녀를 보내고 있는 이모(39·여)씨는 “아이를 낳으라고 장려할 때는 언제고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는 정부와 교육청에 실망했다”며 “누리과정 지원비를 내라고 하면 우리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보육대란은 시작됐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21일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부산에서 열리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총회에서 참석해 교육감들과 해법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날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은 "정부는 한두 달치 예산을 먼저 편성한 뒤 대책을 세우자고 말하지만 벌써 1월이 지나가고 있다"며 "이제 교육부는 못 믿겠다. 대통령이 나서야 해결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백민경 기자, 수원·분당=임명수·박수철 기자 baek.mink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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