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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겨 힘들겠다는 말 숱하게 들어 … 편견 부수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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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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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하는 날 황석정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스튜디오를 찾았다. 동료 배우 권해효씨는 “24년전 처음 봤을 때부터 충격이었다. 특유의 신명과 즉흥성은 마치 무당 같았다”라고 전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초딩들은 귀여운 마녀같대요. 아줌마들은 속 시원하다고 하고, 아저씨들은 털털하다고 반기고… 남녀노소 다 좋대, 국민배우야 이런 제기랄, 크하하하.”

부산여고 나와 서울대 국악과 진학
연극에 중독돼 한예종 다시 들어가
20년간 사기꾼·간첩·탈북자 전문
“100% 나쁜 사람 없다는 게 내 철학”
22일부터 연극 ‘날 보러와요’ 출연

 지난해 대한민국 시청자들은 황석정(45)이라는 인간이 내뿜는 요상한 기운에 홀렸다. 국적불명의 의상·헤어로 무장하고 “모스트스럽게!”를 외치는 패션지 편집장은 파격의 상징이었다.(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선 정반대였다. 쭈그려 머리 감기, 눈곱 낀 푸석한 얼굴 등 일반인이라도 드러내기 꺼릴만한 일상을 처절하게 방출했다. (예능 ‘나 혼자 산다’)

 중간은 없이 늘 극과 극이었다. 또한 예상밖이었다. “설마?”라며 사람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훌쩍 넘고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깔깔댔다. 딱히 예쁘지도 않고, 한편으론 비호감 캐릭터에,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그에게 시청자는 왜 열광할까. 인터뷰 역시 TV 모습 그대로 거침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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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기를 실감하나.

 “솔직히 내가 나간 방송, 일일이 다 챙겨보지 않는 편이다. 근데 식당 가면 사진 찍고 껴안고 난리다. 자기 멋대로 사는 게 신기한지, 아니면 연예인인데 더 궁상맞은 게 만만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여튼 어리둥절하고 감사하다.”

 - 드라마 ‘미생’에선 짧지만 강렬했다.

 “여태 사기꾼·고정간첩 등 거친 인생을 주로 연기했다. 한때는 탈북자 전문 배우였다. 내 연기철학은 100% 나쁜 사람은 없다는 거다. 사기꾼이지만 따뜻한 면이 있고, 아무리 착한 사람도 이면엔 비열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생’에서 아찔한 뒤태로 화제였는데, 사실 대역을 쓴 거다. 내 실제 모습? 벗겨보면 깜짝 놀란다, 크하하하.”

 - 대중적으로 각인된 건 ‘나 혼자 산다’였다.

 “예능에 출연하면서 다짐했다. 거짓말하지 말자고. 곧 들통나니깐. 포장하는 성격도 못 된다. 한편으론 반감도 있었다. 여자는 깨끗해야 하고, 나이 들면 점잖아야 하고, 남자는 어때야 하고 등등. 이런 고정관념 정말 웃긴다.

여자라고 크게 웃으면 잘못인가. 여자도 포르노 본다. 또 나이 든다고 성질 안나는 거 아니다. 다들 아닌 척 할 뿐이다. 절제하고 참는 건 미덕이지만, 불공평하고 비틀린 관습에 마냥 따르고 싶진 않다. 세상의 엉터리 편견, 다 부수고 싶다.”

 - 맡는 역마다 너무 센 편 아닌가.

 “평범하게 하려 해도 강하게 보인다. 반대로 그런 역할만 오곤 했다. 지금껏 여배우로서 좋은 대우를 받진 못했다. ‘그렇게 생겨서 힘들겠다’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난 어쩌다 배역이 오면 무조건 해내야 했고, 그런 절실함이 너무 강렬하게 분출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서울대 국악과(피리 전공)를 나왔다. 동기생 24명중 22명이 국립국악고 출신인데, 그는 특이하게도 인문계(부산여고) 출신이다. “중학교 때 필드 하키를 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하루는 명창 김월하 공연을 보러갔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 다음날 바로 국악학원을 찾아갔다.”

 - 어떻게 연기자가 됐나.

 “대학때 연극반에 있었다. 사실 혼자서 악기 연주할 때가 난 행복하다. 반면 사람들과 뒤섞여 연극 하는 건 버거웠다. 내가 얼마나 모 났고, 독선적인지 들춰지는 기분이랄까. 근데 중독성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도 하기 전에 대학로 극단(한양 레퍼토리)에 찾아갔다. 수제비 끓이고 포스터 하루에 1000장씩 붙였다. 그러다 199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다시 들어갔다.”

 - 타고난 연기자같다.

 “연기가 자연스럽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보이려고 무척 노력한 거다. 알다시피 집안환경이 넉넉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사랑받으며 자라지 못했고, ‘세상엔 돈 밖에 없다’ ‘남자는 다 늑대다’ 등 부정적인 사고로 가득했다. 근데 무대에서 사랑을 표현하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 무명생활이 20여년으로 꽤 길었다.

 “나보다 별 볼일 없는 인간이 연기 잘 한다고 상 받고, 돈 실컷 벌고, 좋은 데 시집가고 그러면 어찌 자괴감이 안 들겠나. 어설픈 위안을 하고 싶진 않다. 다만 하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잘나 보이는 인간들도 다들 태산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더라. 우린 그걸 모르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그저 겉모습만 본 채 비교할 뿐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한테 집중하기 위해 애써 왔다.”

 - 연극 ‘날 보러와요’(22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 출연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다. 연출 김광림, 배우 김뢰하·권해효·유연수·류태호 등 20년전 초연 멤버가 다시 뭉쳤다. 머리 희끗희끗해도 그 형들 하는 짓은 옛날이랑 똑같다. 어찌나 열심히들 하는지… 짠하고 정겹다.”

글=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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