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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관능미와 감각에 취한 세기말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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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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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지음
이현경 옮김, 을유문화사
495쪽, 1만5000원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1863~1938)는 극우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군인·플레이보이로 더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본업인 문학에서의 업적이 간과된 측면이 있다. 세기말의 향락적이고 탐미적인 이탈리아 데카당스(퇴폐주의) 운동을 이끈 인물인데도 말이다. 데카당스 운동은 프랑스 상징주의와 영어권 유미주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인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은 단눈치오의 작품은 독일의 토마스 만,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단눈치오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했던 숱한 세기말·세기초 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겨룬다. 우아한 문체로 상상을 넘어서는 사건과 인간의 심리와 욕망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로 이름 높다. 다만 영어·독일어·프랑스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작품을 썼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소 늦게 알려지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은 엘레나 무티와 마리아 페레스라는 두 여인을 동시에 사랑하게 된 안드레아 스페렐리라는 청년의 이야기를 다뤘다. 스토리의 줄기에서 보듯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삶보다 본능에 충실한 개인의 몰이상적인 감정에 충실한 작품이다. 그러면서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감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그린다. 예를 들어 “예전에 엘레나는 한 시간 동안 은밀한 시간을 가진 뒤, 옷을 입기 전 바로 이 벽난로 앞에 잠시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관능미를 절제하며 표현하면서도 상상을 부르는 글쓰기가 매력적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로마 사교계와 당시 시대상도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유럽 남쪽 나라의 감성적인 사람들의 세기말 사고 방식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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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쾌락』은 관능미를 절제했는데도 관능적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성취(Fulfilment)’.

1889년 작품이니만큼 세기말 유럽의 쾌락주의·유미주의 경향이 세세하게 드러난다. 전 세대 낭만주의의 상징인 이국취미도 등장한다. “구석구석에, 극동의 직물로 만든 커튼 사이에 그림자들이 모여 있었다…군데군데 놓인 가구에서 비취와 상아와 자개 상감이 반짝였다. 가구들 뒤의 바나나 나무 아래 놓인 커다란 금색 불상이 보였다.” 서구인이 보는 동양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탈리아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번역자가 이탈리아어를 바로 우리말로 옮겼다는 점에서 번역도 신뢰가 간다. 참, 단눈치오에 대해 한마디. 극우민족주의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단눈치오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과 연관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단눈치오는 오해와 편견의 피해자다. 무솔리니는 단눈치오가 활약했던 아르디티 부대의 검은 티셔츠와 단눈치오의 극우민족주의를 차용했다. 하지만, 단눈치오는 비인간적인 파시즘과 독재자인 무솔리니를 혐오했다. 만년을 은둔하며 지낸 이유다.

[S Box] 52세에 특공부대 입대…단눈치오의 ‘피끓는 인생’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세계사 교과서에 ‘피우메 사건’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52세의 나이에 입대해 전쟁영웅이 됐다. 아르디티라는 특공부대에 들어가 적진으로 돌격하고, 쌍엽기를 몰고 숙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빈까지 왕복 1200㎞를 비행해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빈 하늘에서 자신이 쓴 애국주의적 산문이 인쇄된 전단 5만 장을 뿌리고 돌아왔다.

 극우민족주의 사상이 더욱 강해져 국경 밖의 이탈리아인 거주지를 자국 영토로 합병해야 한다고 믿는 ‘실지회복주의자’가 됐다. 1919년 파리평화회담에서 이탈리아 동북부 국경의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 피우메(현재 크로아티아의 리예카)의 운명이 모호해지자 즉각 행동에 나섰다. 민병대 2000명을 이끌고 도시를 접수했다. 하지만, 결국 이탈리아 정부까지 외교문제를 들어 난색을 표하자 이듬해 12월 포기하고 돌아왔다. 혈기 넘치는 삶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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