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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 개인들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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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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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석
시인·단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숨은 신』의 저자인 뤼시앵 골드만은 문학을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그가 말하는 세계관은 개인이 아니라 ‘한 집단의 구성원들을 서로 결속시켜 주고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과 구별시켜 주는, 사상과 소망과 감정의 복합체’를 지칭한다. 쉽게 말해 특정 집단은 다른 집단과는 상이한 ‘사상과 소망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경우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집단의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세계관, 즉 해당 집단의 사상과 소망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늘 소수라는 것이다. 골드만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세계관을 고도의 일관성을 띤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소수를 ‘예외적 개인들’이라 부른다.

 중요한 것은 누가 공적 매체들을 소유하고 집단의 발언권(표현권)을 독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인일 수도 있고, 언론인일 수도 있고, 작가이거나 학자 혹은 종교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평범한 대중이 아닌 소수이고, 그런 의미에서 ‘예외적 개인들’이다. 이 예외적 개인들은 표현의 ‘무기’를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 혹은 계급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대변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소위 ‘여론’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유포된다. 여론이란 워낙 큰 우산 같은 것이어서 그 아래에 집단·계급·직업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 말하자면 ‘차이’를 배제하고 지운다. 이렇게 하여 권력을 가진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마치 ‘대중’의 이해관계인 것처럼 포장되는 것이다.

 다시 문제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발생된다. 하나는, 예외적 개인이 아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는 전혀 다르거나 상반된 입장과 주장에 (그것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부화뇌동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외적 개인들 역시 자신들이 ‘대의’가 아니라 실은 ‘특정한’ 집단 혹은 계급의 대변자라는 사실 자체를 종종 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다수 대중의 이해관계로 왜곡·변형되는 현상을 우리는 수많은 선거에서 목도한다.

 그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이제나저제나 국가적 ‘대의’지만, 속내는 다른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대의라는 이름에 기만당하는 것은 대중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집단과 이해관계에 철저히 복무한다. 무엇이 그들에게 해가 되고 득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예외적 개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표현’의 도사들이기 때문에 자기 집단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절대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문제는 자신들이 내세운 ‘대의론’에 스스로 감동·감화되어 자신들이 마치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넘어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다.

 『고리오 영감』 『인간 희극』 등의 작품으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알려진 발자크는 신분상으로는 귀족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였다. 그가 활동했던 19세기 전반 프랑스는 봉건 귀족 제도가 몰락하고 근대 시민사회가 도래하던 과도기였다. 말하자면 발자크는 몰락해 가는 (귀족으로서의) 신분과 세계관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 작품을 통해 (몰락해 가던) 자기 계급에 대한 연민과 이해관계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가 재현한 것은 봉건 귀족의 몰락의 필연성과 근대 시민사회의 도래의 필연성이라는 역사의 큰 흐름이었다. 많은 논자가 그의 작품들을 ‘리얼리즘의 위대한 승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 역학으로 볼 때 예외적 개인들은 공적 개인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기에 공공선(公共善)을 지향한다고 해서 크게 잃을 게 없다. 오히려 기득권 위에 ‘정의’라는 복을 하나 더 추가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제 밥그릇만 들여다보며 그것을 대의라 하면 될 것인가. 그들은 특정 집단이 아니라 공공(公共)의 승리를 지향해야 한다. 위장하지 말고 펜(표현의 무기)의 방향을 돌려야 할 것이다.

오민석 시인·단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